아산에 대한 회상
다음의 글들은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와 오랫동안 교분을 나눈 분들이 아산과 함께한 일화를 회고하면서 아산에게서 느낀 감회, 그리고 추모의 마음을 담은 글입니다.
- 우리 시대의 거목 정주영 회장님을 생각하면서 정의숙(이화여자대학교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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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회장님과 만난 세월이 벌써 3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제가 1980년 총장직에 있을 때 학교 건축일로 현대건설과 만나게 되면서부터 이니까요. 그 건축 관계에서 정 회장님은 참 통 크고 시원시원하시며, 인정이 많으신 어른이시라는 깊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정 회장님께서는 이화에게는 참 든든한 후원자 이셨습니다.
아산병원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중추적인 사업으로서 정주영 회장님의 꿈과 뜻의 결실입니다. 아산병원은 그 규모에 있어서 아주 거대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 큰 병원을 어떻게 환자로 가득 채우느냐고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환자가 넘쳐나게 많았습니다. 그것은 아마 첨단 기자재의 우수성과 각 분야에 실력을 갖춘 우수한 명의가 많은 까닭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외된 계층에서부터 상류 계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믿고 찾아주는 것 같습니다. 정주영 회장님의 꿈과 뜻이 이루어진 셈이지요. 시설과 의사가 모두 탁월하고 환자의 수도 많으니 말이지요. 정말 한국에 아산병원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정 회장님은 통 크신 거목 그 자체이셨습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투철함은 물론이고, 일을 이룩함에 있어서도 그 시각 자체가 현실을 넘어 미래를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당장 오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다가올 100년, 1000년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일을 도모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일의 규모나 범주도 가히 세계적인 차원을 넘어설 정도로 대단한 거목이셨습니다.
정주영 회장님은 그러면서도 한 없이 여린 심성을 가지신 어른이셨습니다.
어린 시절 당신께서 경험하신 그 고난의 나날을 떠올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지난 날 그분 자신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셨기에 그들을 늘 다정한 이웃으로 받아들이곤 하셨습니다. 그 분은 어린 시절 강원도 통천의 송전리 아산 마을에서 함께 어울렸던 친지와 친구들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사셨습니다. 가난한 이웃이야말로 정주영 회장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들을 위해 돈을 벌었고, 공장을 세웠으며, 새 길을 건설했고, 온 세상을 누비고 다니셨습니다. 어느 면에서 정주영 회장님의 삶은 모든 이들을 가난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들을 위해 그분은 탁월하신 경제활동에 전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담겨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정주영 회장님이야말로 “꿈꾸는 소년”이었다는 점입니다. 당신의 이상을 이룩하기 위해 천만리 밖도 비행할 수 있었고, 꿈을 찾아 이 세상 구석구석을 누빌 수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현실은 언제나 부족한 결핍의 실체였으며, 앞으로 충족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소 떼를 몰고 방북의 고난을 직접 경험하셨던 일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언제나 정주영 회장님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미래야말로 다 같이 어울리는, 말 그대로 함께 손잡는 새 세상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일구기 위해 밤낮으로 이리저리로 뛰어다니시던 모습은 아직도 우리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경제뿐만 아니라 한 때에는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셨는데 이는 이상에 목말라했던 현실 정치에 대한 강한 반작용에서 기인된 사실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정주영 회장님은 실로 통 크신 거목이셨고, 우리들의 따사로운 이웃이었으며, 미래를 찾아 한 없이 갈구하셨던 인간적인 이상주의자이셨습니다.
그 모두는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한국 현대사에 있어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서의 정주영”으로 귀결됩니다. 정주영 회장님께서 이룩하신 역사인으로서의 종적은 뒷날 어느 누구도 쉽사리 모방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거듭거듭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인으로서의 정주영 회장님을 기리는 마음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되새기면서 다시 한번 그 분의 위대한 족적을 떠올려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