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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글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는 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서 일간지에 ‘새 봄을 기다리며’(서울신문, 1981. 2. 25) 같은 글을 직접 집필해 기고하셨습니다. 아산께서 직접 쓰신 글들을 모았습니다.

20년 전의 나

근래 허물없는 서울 친구들을 만나 「감자바위 촌놈 잘 있었나」하고 문안을 할 때면 나는 다시없이 즐거워서 破顔大笑(파안대소)를 합니다. 나의 친구들의 인사말대로 나는 江原道(강원도) 通川(통천) 寒村(한촌)에서 참으로 勤儉(근검)한 農夫(농부)의 6남 1녀 중의 장남인 촌놈으로 성장했습니다.

 

흉년이 들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웠고 소 팔고 돼지 판돈은 田畓(전답)을 더 사기 위하여 장롱 속에 깊이 묻어 두는 아버지를 보기도 하였습니다. 19세에 上京(상경)하여 당시 安岩(안암)골 普成專門學校(보성전문학교) 新築場(신축장)에서 大齒(대이)돌을 등에 지고 올라갈 때는 다리가 벌벌 떨렸지만 그 훗날 형편이 나아져 넷째 동생 世永(세영)군(現代自動車 社長(현대자동차 사장))이 高大(고대)에 入學(입학)하였을 때는 감회가 깊었습니다.

 

둘째 동생 仁永(인영)군(現代洋行 사장(현대양행 사장))이 上京(상경), 인쇄소 文選工(문선공)으로 일하면서 夜學(야학)을 다니고, 나는 精米所(정미소)에 일터를 얻어 삭월세방을 얻고 살 때 우리 형제는 저녁 한 끼만 더운밥을 손수 지어먹고 아침 점심은 찬밥으로 飢食(기식)을 甘食(감식)으로 지냈습니다. 밥 지을 땔나무 값을 아껴 쓰기 위한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30年(년) 전에 이미 熱管理(열관리)훈련을 해둔 셈입니다.

 

仁永(인영)군은 薄俸(박봉)을 모아 東京(동경) 靑山學院(청산학원)으로 苦學(고학)의 길을 떠났고, 나도 안 먹고 안 쓰고 薄俸(박봉)을 푼푼이 모아서 장사밑천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나라에서 저축을 生活化(생활화)할 것을 국민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저축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가난하게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가난과 고생길을 면하려면 어려운 중에도 勤儉(근검)저축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는 푼푼이 모은 돈으로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작하였습니다. 삭월세로 얻은 빈터에 망치 몇 자루와 「스파나」 몇 상자였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는 기술일이라서 그런지 재미를 톡톡히 보면서 6ㆍ25전해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중지하고 現代建設(현대건설) 창립할 밑천을 단단히 만들었습니다. 現代建設(현대건설)은 다시 現代自動車(현대자동차)로 하여금 명실 공히 국제경쟁력을 가진 종합자동차공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공신력을 길러주었습니다.

 

강원도의 山村(산촌) 峨山里(아산리)가 나의 마음의 고향이라면 自動車工場(자동차공장)은 사업의 고향입니다. 요사이는 造船(조선)에 미쳐서 세계적인 평가를 받기 위하여 밤낮이 없습니다. 建設(건설), 造船(조선) 등 8천여 명의 技能工(기능공)들이 鐵帽(철모)를 쓰고 어두운 첫 새벽부터 쏟아져 들어오고 밤낮없이 교체되는 것을 바라볼 때 나의 임무는 다시없이 막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과거 나의 동무들은 나를 周永(주영)이라 불렀는데 요사이 사업관계로 알게 된 친구들 중에서 시멘트 동업자였던 李庭林(이정림)씨는 「콩 좋아하는 말」이라 부르고, 건설 동업자인 趙鼎九(조정구)씨와 李載濬(이재준)씨는 「村(촌) 당나귀」라고 부르지만 기특한 고향 친구 朴龍學(박용학)군과 자동차 동업자인 金昌源(김창원)군은 한결같이 나를 아저씨라고 불러주어서 서울생활에 보람을 느낍니다.

 

나라의 은혜로 현재 모두 한결같이 사업을 하고 있는 우리 6형제들이 내 친구들을 親兄(친형)님 이상으로 존중하여 주어서 兄弟間(형제간)에 더욱 깊은 友愛(우애)와 情(정)으로 부모님께 孝道(효도)한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40년 전 고향 부모님이 맏며느리 감으로 일등이라고 고르고 고른 내 아내는 요사이 9남매의 어머니로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두메산골 처녀로서, 서울 노인으로 개명하여가는 아내는 대학에 다니는 아들들이 제 앞가림도 못하는 학생이 될까봐 걱정이 日課(일과)랍니다.

 

30년 전 구멍가게는 세계의 은행가들이 스스로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찾아올 만큼 자랐습니다. 내가 잘되는 길이 나라가 잘되는 길이요, 나라가 잘되는 길이 곧 내가 잘되는 길이라고 가르치는 말은 강인한 내 身軀(신구)에 정성어린 애국심을 심어주는 듯합니다.

 

※ 이 글은 정주영 초대 이사장께서 1970년대 후반 한 일간지에 기고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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