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21
- 부문 : 복지실천상
- 소속(직위) : 사회복지법인 동성원 선임복지사
- 수상자(단체) : 정혜숙
아동보육에 전념해온 31년의 시간
1951년 설립된 아동복지시설 동성원에서 선임복지사로 근무 중인 정혜숙(58)씨는 지난 31년간 500여 명의 아동을 길러냈다. 영아부터 고등학생까지 40명의 아동이 생활하고 있는 동성원에서 아이들이 정혜숙 씨를 부르는 호칭은 ‘선생님’이 아닌 ‘엄마’다.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니까 정이 확 들면서 내 자식이다 싶더라고요. 저도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경남 김해에서 5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정혜숙 씨는 학구열 높은 부모 덕분에 마산여고를 거쳐 1987년 경상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때도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바로 취업이 되지는 않았다. 특히 심리학과를 나오면 보통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임상심리상담원이 되었는데 졸업 후 취업을 계획하던 정혜숙 씨는 2~3년 정도 취업 준비 기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부산에 있는 아동복지시설에서 근무하던 대학 동창의 소개로 동성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1990년 당시는 정혜숙 씨의 나이 스물일곱 때였다.
기질도 성격도 다른 아이들, 이해로 품어
정혜숙 씨는 동성원에 근무하면서 오갈 데 없어 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지금은 고등학생까지 돌보고 있지만 처음 근무할 때만 해도 아기들이나 3~6세의 영아들이 대부분이었다.
한창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양육 인력이 부족해 외출이나 외박은 꿈도 꿀 수 없었다. 17명의 아이들을 24시간 상주하며 돌봤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아이들의 웃음에 힘이 났고,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마음이 들떴다.
정혜숙 씨는 비록 친엄마는 아니지만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봤다. 그러면서 양육에는 왕도가 없고 법칙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열 명이면 열 명, 기질과 성격이 모두 달랐다. 그런 차이를 이해하고 아이들을 대하려 노력했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있는 정혜숙 씨>
아이들의 진로와 자립에 관심 기울여
2001년, 동성원은 아이들의 체력과 주의력 향상을 위해 스포츠댄스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1인 1악기 교육을 진행하면서 2005년 국악 중심의 예술단을 만들었고 2009년에는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국악을 넘어 양악까지 음악교육의 기회를 확장시켰다.
그 과정에서 정혜숙 씨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을 격려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상담, 지원하는 등 아이들의 진로와 자립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며 트롬본에 재능을 보인 아이가 음대에 진학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지지한 것도 한 사례다.
정혜숙 씨는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초등학생 때 불던 트롬본으로 연주하는 것이 안타까워 사비 500만 원을 들여 중고 트롬본을 사주기도 했다. 악기가 바뀌자 소리가 달라졌고 아이의 자신감도 높아졌다. 그만한 보람이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놀이시간 중에>
아이들이 건강한 삶을 일궈갈 수 있도록
정혜숙 씨는 2006년부터 아이 5명에게 디딤씨앗통장을 만들어 주고 5만원씩 후원하기 시작했다.
디딤씨앗통장은 후원자가 후원금을 입금하면 월 최대 5만원을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제도다.
“디딤씨앗통장은 좋은 제도인데 후원자가 없어서 아이가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더라고요. 제가 조금 후원하면 그 돈이 배가 될 텐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나중에 아이가 자립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랐습니다.”
정혜숙 씨 품에서 자란 아이들 중에는 사회 구성원으로 어엿하게 자리를 잡은 아이들이 많다. 동성원에 입사해 처음 키웠던 아이는 어느새 서른 살이 되었고, 얼마 전 결혼해 가정을 일궜다. 정혜숙 씨의 영향을 받아 사회복지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현재 장애인 주간보호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다. 언어 · 청각치료사로 활동 중인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자립 후에도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정혜숙 씨를 찾아 도움을 청하거나 상의할 정도로 끈끈한 유대관계가 형성돼 있다.
“아이들이 잘 자라서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일궈갈 때 엄마로서 가장 뿌듯합니다. 처음 동성원에 들어와 ‘엄마’라고 불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봉사, 희생정신 이런 표현은 너무 과해요. 그저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보려 노력했지만 항상 아픈 손가락은 있기 마련이다. 더 잘해주지 못한 아이들이 눈에 계속 밟힌다는 정혜숙 씨는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오늘도 양육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