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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20
  • 부문 : 아산상
  • 소속(직위) :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우간다 분원장
  • 수상자(단체) : 여혜화

우간다의 의료와 교육환경을 바꾸는 손길

 

‘하느님, 제발 무사히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앞으로 수녀로서 봉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이었다. 1남6녀 집안의 귀한 외아들인 남동생이 친구들과 놀다가 밤이 깊은 시간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하고 어른들은 동생을 찾기 위해 밤늦도록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만히 집에 앉아서 기도를 드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친가와 외가를 합해 신부 6명, 수녀 14명을 배출했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종교인’ 집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소녀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동생은 친구와 노느라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자신을 찾는 소리를 듣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의 사건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끝났고 모두의 기억 속에서도 서서히 지워져갔다.

 

시간이 흘러 여혜화(72) 수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릴 때의 그 기도와 약속이 생각났다. 기도를 드릴 때의 간절했던 마음은 어디에도 없고 성당도 제대로 나가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 생각이 마음을 점점 더 괴롭히기 시작했다. 여 수녀는 마음을 털어놓은 뒤 거절 대답이라도 듣고 싶어 용기를 내어 수녀원의 문을 두드렸다.

 

“수녀원에 가고 싶지는 않은데 어린 시절 하느님께 드린 약속이 있어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나이도 어리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결정하고 싶은데 양심이 계속 수녀원에 가야 한다고 이끌어서 한 말씀 들으러 왔습니다.”

 

여 수녀의 고백을 듣고 난 원장 수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하느님이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열아홉 살에 지킨 약속

 

여혜화 수녀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대구에 위치한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했다. 가족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여 수녀의 결심은 확고했다.

 

예비 수녀로서 수련 과정을 보내던 여 수녀는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수녀회로부터 유학 제의를 받았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학업에 두각을 보이던 여 수녀의 재능을 눈여겨본 수녀회에서 필리핀에 소재한 가톨릭재단 산하 대학교 진학을 추천한 것이다. 수녀회에서 종신서원을 하지 않은 예비 수녀에게 유학의 기회를 주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1976년 간호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여 수녀는 귀국 후 유기서원을 하여 정식 수녀가 되었고, 수녀회 재단에서 운영하는 파티마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병원에서 오랜 기간 간호사 생활을 하던 여 수녀는 간호사로 환자에게 봉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고민도 많았다.

 

‘수도자로서 진정한 삶은 무엇일까?’

 

평생 수도자로 살 것을 맹세하는 종신서원을 앞두고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거듭하면서 여 수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소록도병원 파견을 자원하였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환자 간호에 매진했고, 일요일에는 따로 시간을 내어 환자들의 집을 찾아 나섰다. 한센인들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고 안부를 묻는 등 그들 속에서 함께 살아갔다.

 

소록도병원에서 간호사로 보내던 기간은 여 수녀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 수녀는 3년간의 봉사를 마친 후 1989년 이탈리아 로마의 수녀회 본부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수녀로서 평생을 봉사하며 살아가겠다고 맹세한다.

 

가장 멀고, 가장 힘든 곳으로

 

 

당시 해외 파견을 자원하던 여 수녀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우간다를 선택했다. 가장 먼 곳이고 또 가장 힘든 곳이었다. 수녀회에서도 첫 진출 지역이었기에 아무런 기틀도 닦여있지 않은 백지의 상태였다.

 

첫 파견자로 가게 될 경우 힘든 길이 펼쳐질 것이 분명했지만, 여 수녀는 기쁜 마음으로 우간다 파견을 받아들였다.

 

우간다에 도착해서 처음 도전한 것은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예산도,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진료소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유럽과 미국 신자들이 모아준 후원금이 도착하면 벽돌 한 장을 사고, 또 후원금이 오면 벽돌 한 장을 사는 식으로 1995년이 되어서야 수녀원이 딸린 작은 진료소, 성 베네딕도 헬스센터를 열 수 있었다. 진료소의 운영 원칙은 환자가 돈이 없어도 치료부터 먼저 해주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어려운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는데 치료비나 약값을 낼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돌려보내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성 베네딕도 헬스센터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후 ‘살아서 해볼 수 있는 치료는 다 해봤다’고 만족해하며 눈을 감는 환자도 있었다.

 

말라리아, 에이즈도 겁나지 않는다

 

우간다에는 말라리아 환자가 제일 많고, 치사율도 높은 편이다. 여혜화 수녀도 말라리아를 앓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하느님이 데려가지 않으시면 떠날 생각을 안 했습니다.”

 

늘 죽을 각오를 하고 살기 때문인지 여 수녀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금도 걱정스러워하는 모습이 없었다.

 

하루는 직원에게서 에이즈 환자가 플라스틱을 덮어쓰고 누워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급히 데리고 온 환자는 어린자녀 4명을 둔 가장이었다. 잘 먹이고 약을 쓰면 일어날 것 같아서 여 수녀는 의사보고 무조건 살려내라고 했다. 고가 약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의사가 말했다.

 

“환자가 하루 벌어도 사지 못할 만큼 비싼 약인데 죽을 때까지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무조건 살려내야 합니다. 하느님이 도와주시겠지요.”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예상치 못한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건물을 처음 지을 때 도움을 줬던 해외기관 관계자들이었는데, 병원을 유럽 수준으로 잘 운영하고 있다며 감탄을 했다. 본인들이 더 도와줄 게 있는지 묻기에, 여 수녀는 마침 비싼 약값 때문에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후 해외기관에서 매달 1천 달러를 후원금으로 보내줘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다.

 

이곳에서 치료받은 환자들의 표정은 죽음을 앞두고도 늘 밝았다.

 

“수녀님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 죽음도 겁나지 않습니다. 편히 보내주십시오.”

 

우간다 밖까지 소문난 성 베네딕도 학교

 

열악한 환경과 질병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여혜화 수녀는 병원과 함께 교육시설 설립을 계획했다. 1995년 유치원의 문을 열어 인근 마을과 교외의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2000년에는 초등학교를 추가로 설립했다.

 

우간다에서는 초등교육 7년 과정을 마치고 난 후 국가고시를 치르는데 상위 득점자만 중등교육 진학이 가능하다. 여 수녀가 운영하는 성 베네딕도 학교는 국가고시 합격자 수가 다른 학교보다 많아 지역의 명문 학교로 손꼽히고 있다. 문제가 있는 아이들도 이 학교에 오면 변화가 된다고 할 정도로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돌봐서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입학을 원한다고 한다.

 

성 베네딕도 학교는 교육시설 부족으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었으며, 현재는 우간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지역 전체의 명문 학교로 자리 잡았다.

 

27년간 우간다 공동체를 지키다

 

 

여혜화 수녀가 우간다에 진출한 지도 어느덧 27년째다. 우간다 공동체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는 여 수녀는 다른 수녀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와중에도 묵묵히 공동체를 지키며 현지의 활동들을 이끌어왔다.

 

허허벌판인 진자 지역에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초기에는 사람들의 냉랭한 반응에 상처 입기도 했고,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이라는 의심도 많이 받았다. 여 수녀는 지금까지 이뤄낸 가장 큰 성과가 있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앞으로도 계속 활동해도 된다는 인정을 받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진자에 자리 잡을 당시 병원과 학교를 세울 부지는 우간다 정부와 계약을 맺고 25년간 유상으로 임대한 것이다. 임대 만료 기간이 다가오면서 여 수녀는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을 자지 못했다. 이러한 걱정이 무색하게 2014년 우간다 정부는 7만5천 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땅을 전액 무상으로 기증해 주었다. 지난 27년간 주민들의 건강, 교육, 화합에 기여해왔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여혜화 수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현장에서 계속 일하고 싶은 마음이다.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우간다에서 지역 주민들과 삶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픈 생각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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