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20
- 부문 : 자원봉사상
- 소속(직위) : 가위사랑봉사단 단장
- 수상자(단체) : 김옥이
가위 하나로 펼치는 아름다운 봉사
김옥이(60) 씨는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했다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환자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됐다. 그의 눈에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모습은 환자의 얼굴도 병원의 침실도 아닌 망자(亡者)의 산발한 머리였다.
김옥이 씨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어쩌면 저것이 내가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 산발한 머리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머리는 계속 자라니까 미용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아플 때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김옥이 씨는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미용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족 몰래 학원에 등록해 미용을 배웠지만, 미용 기술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현실에 크게 실망했다. 결국 학원을 그만두었고, 일본으로 미용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미용 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가겠다고 했더니 집안이 완전히 뒤집혔다.
“내가 농사지어서 힘들게 대학 보내놨더니 그깟 미용을 하겠다는 거냐.”
당시만 해도 미용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김옥이 씨는 하는 수 없이 전공인 경영학을 공부하러 가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유학 마치고 미용 강사 생활 시작
1984년 일본에서 미용을 배우고 돌아온 후에는 미용 강사로 일했다. 일을 마치고 남는 시간이면 혼자 미용 도구를 챙겨 양로원, 보육원, 요양병원 등을 찾아다니며 미용 봉사를 시작했다.
온종일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라고 해도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지저분하고 덥수룩한 머리의 노인과 환자들이 김옥이 씨의 손길을 거치면서 단정하고 깨끗하게 변신했다.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가 머리를 다듬고 나서 거울을 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 김옥이 씨는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김옥이 씨는 5년 정도 강사로 일한 후 직접 미용학원을 열었고, 수강생들에게 실습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용실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일정 과정을 마친 수강생들은 자신의 미용실에서 직원으로 일하며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했고 경력이 쌓이면 더 큰 곳으로 가서 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창업을 원하는 사람들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미용은 기본, 청소와 목욕까지
김옥이 씨는 2000년 가위사랑 봉사단을 설립해 자신이 양성한 10여 명의 봉사단원들과 함께 매주 1~2회 요양병원 등을 방문하고 있다. 미용 봉사는 단순히 머리만 깎고 끝나는 일은 아니었다. 먹을 것을 챙겨가서 일일이 나눠주고, 청소와 함께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목욕 봉사까지 해주었다.
어렵고 힘든 곳들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던 중 상상하기 어려운 슬픔을 겪기도 했다.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오지마을로 봉사활동을 나갔다가 유산을 하고 만 것이다. 몸을 추스르느라 잠시 봉사활동을 쉬기도 했지만, 영원히 멈출 수는 없었다.
단정한 모습으로 나눈 마지막 인사
“남편이 병석에 누워 있는데 머리를 한 번 잘라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미용 봉사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몇 년째 병석에 누워있는 환자의 머리를 다듬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오랫동안 다듬지 못한 머리는 산발이었다. 김옥이 씨는 환자의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해주었고, 이후 16년 동안이나 그 환자와 인연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를 자르러 갔더니 환자의 병색이 어느 때보다 좋지 않음이 느껴졌다. 김옥이 씨는 무엇인가 직감한 듯 평소보다 정성껏 머리를 정돈해주었다. 며칠 후 환자의 아내와 딸이 김옥이 씨를 찾아왔다.
“원장님, 남편이 돌아가셨어요.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안타까웠지만, 세상을 떠나는 이가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김옥이 씨가 1984년 봉사활동을 처음 시작한 이래 봉사자들과 함께 미용 봉사를 해준 사람은 8만여 명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