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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20
  • 부문 : 효행ㆍ가족상
  • 소속(직위) : 전남 광양
  • 수상자(단체) : 김순래

치매 시어머니, 4남매와 함께 건강과 화목을 지켜온 세월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육지가 된 섬, 전라남도 광양시 태인도. 김순래(71) 씨는 이 섬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고, 이곳 사람과 결혼해 한평생 태인도에서 살고 있다. 섬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단정한 집이 그가 첫 살림을 꾸린, 가족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곳이다.

 

평범한 삶에서 억척스런 삶으로

 

김순래 씨는 어릴 적부터 반듯한 성품과 빈틈없는 솜씨로 동네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처음 해보는 일도 눈썰미가 좋아 곧잘 따라하는 데다가 밭고랑을 하나 매도 “순래가 하면 똑소리 난다”는 이야길 들었다.

 

이 모습을 눈여겨본 건너 마을 살던 시아버지의 적극적인 구애로 혼담이 오갔고 1970년 스물 하나의 나이로 시집을 갔다. 집안일과 들일, 밭일을 하며 가정을 살뜰히 챙겼다. 7남매 중 장남의 며느리로 그 시절 여느 집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셋째 아이가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돌이 지나도 걷지 못하고 말도 어눌했다. 첫째, 둘째는 쑥쑥 자라는 데 셋째는 마냥 어린아이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업어 키우며 노심초사 마음을 졸였다.

 

그러던 중 또 한 번의 어려움이 닥쳤다. 1993년 남편이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것 같았다. 온 세상이 까맣게 눈앞에서 멀어져갔다.

 

당시 김순래 씨는 44세. 첫째 딸은 막 성인이 되었지만 내리 아들 셋은 다 사춘기 십대였다. 거기다 셋째는 뇌병변 2급 장애였고 나이 드신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생계의 부담이 그의 정신을 번쩍 나게 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청소 용역회사에 취업하여 태인도 주변에 위치한 회사의 청소일을 맡아 성실히 해나갔다.

 

요즘도 그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출근했다가 오전 청소를 마치고 잠시 집에 들러 정오 지나 다시 출근해서 오후 청소를 한다.

 

하루 두 번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출퇴근을 반복하면 힘들 법도 한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있었기에 남편 없이도 가장으로서 가계를 꾸릴 수 있었다며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한다.

 

가족들의 상처를 보듬으며 꽃피운 화목

 

 

남편이 사망한 후 그 빈자리는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더구나 시어머니는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행동이 늘어만 갔다.

 

공격적인 말과 태도로 가족 모두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나중에야 그게 치매 증상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그저 눈물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상처는 받았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김순래 씨는 아직도 “내가 니한테 마음뿐이지, 그걸 어찌 밖으로 꺼내질 못하겠네”라는 시어머니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다. 2017년 98세의 나이로 시어머니가 작고할 때까지 극진히 모신 건, 이런 그의 고운 심성 덕분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뿌리 없는 나무 같은 날들’이었지만 그를 붙잡아준 건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었다. 자녀들은 장애가 있는 셋째에게 그의 온 관심이 가는 걸 진심으로 이해하고 도와주었다. 철이 일찍 났는지 제 앞가림을 스스로 하며 잘 자라주었다.

 

첫째 딸과 둘째, 넷째 아들은 장성해 가정을 꾸려 독립했고 셋째 아들은 아직 품 안의 자식이다. 셋째 아들은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요즘엔 광양시 장애인복지관에서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전용 스포츠 ‘보치아’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마음을 나누고 정을 나누며 우리 다 함께

 

 

김순래 씨는 마을일에도 빠지지 않고 솔선수범하고 있다. 넓게 보면 다 가족이고 친지인 데다가, 외지 사람들의 유입이 흔치 않은 마을이다 보니 유대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다. 결혼한 해부터 지금까지 그는 부녀회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몇 해 동안은 부녀회장을 역임하며 무료급식이나 마을정화운동 등의 다양한 봉사활동을 이끌었다.

 

김순래 씨는 매일 밤 이부자리에 누워 마음속으로 일기를 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일 무슨 일을 할 건지 하나하나 짚어보며 혹시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하지 않았나 돌아보곤 한다.

 

어릴 적부터 “너는 왜 두 개를 가지지 못하냐, 하나를 꼭 누굴 줘야 직성이 풀리냐”고 언니에게 핀잔 들었던 시절에서 변한 건 없다. 그 시절 소녀는 자라 사남매의 어머니, 일곱 손주의 할머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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