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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16
  • 부문 : 사회봉사상
  • 소속(직위) : 아동복지 보육시설
  • 수상자(단체) : 한국SOS어린이마을

“53년 간 위기의 아이들 1,200여 명 기른 위대한 어머니들”

 

 

이 세상에는 단순히 ‘직업’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SOS어린이마을(이하 마을)의 독특한 제도로서 양육 전문가를 일컫는 ‘어머니’도 그런 직업 중의 하나다.


마을의 어머니는 겉모습만 보면 일반 아동양육시설의 보육사(생활지도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여느 가정의 진짜 어머니들과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아이들을 위해 실천하는 헌신과 사명감을 들여다보면 일반 직업의 범주 안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을의 어머니는 우선, 평생 동안 결혼하면 안 된다. 이혼한 사람도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며, 2~3년의 어머니 수련과정과 마을 내부의 검증과정을 거쳐 어머니로 임명된다. 어머니의 배경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종교적인 믿음과 아동 양육에 대한 신념으로 어머니를 선택한다.


어머니는 5~7명의 아이들과 함께 일반 가정집 형태의 단독주택 에서 생활한다. 아이들이 자립해서 가정을 떠나면, 다시 새로운 아이들이 가정에 들어온다. 어머니는 60세 정년을 맞을 때까지 끊임없이 아이들을 기른다.


한국SOS어린이마을의 대표는 천주교 대구 대교구장인 조환길 대주교다. 한국SOS어린이마을은 1963년에 처음 설립된 대구와 1982년에 개원한 서울과 순천 등 세 곳이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SOS어린이마을 국제본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 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월급 없이 자원 봉사했다. 

지금의 어머니들은 정부 지원으로 급여를 받으며, 정년을 맞으면 퇴직금과 국민연금을 받는다. 마을 관계자에 따르면, 어머니들은 급여의 대부분을 자신이 기르는 아이들의 학원비 등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서울과 순천에는 어머니가 각각 5명과 7명 있으며, 지금까지 은퇴한 어머니는 대구가 17명, 서울이 12명, 순천이 7명이다. 이 어머니들이 버림받아 상처 입은 아이들에게 헌신하겠다는 소명의식으로 1963년부터 2016년 10월까지 1,207명의 아이들을 길러냈다.


마을에는 미혼모의 아이들과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 학대받거나 방임 상태의 아이들이 들어온다. 마을 아이들의 연령은 다양하다. 0세~만 18세 이전에는 다 들어올 수 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입소하면 대학에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연장이 가능하다.


친형제자매는 한 가정에 배정하는 게 원칙이다. 성별과 나이는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다. 마을에 오기 전에 지자체에서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아이의 특성을 파악해 어머니들이 모여 회의한 후, 어머니 성향과 맞추어서 어느 집에 갈지 결정한다.


대구와 서울·순천의 각 마을에는 늘 70명 안팎의 아이들이 머무는데, 아이들은 모두 학교 외에 학원에 다닌다. 각 마을에서는 심리치료와 원예치료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제공받을 수 있다. 아이들이 외부 후원을 많이 받기 때문에 영어 유치원도 다니고, 뮤지컬도 보러 다닌다.


성공적으로 자립한 마을 출신들이 많다. 현재 서울마을 원장과 사무국장도 마을 출신이다. 음대 교수, 음악교사, 중소기업 사장, 사회복지사 남매, 육군 장교도 나왔고, 프로 축구선수도 배출했다.


마을의 기초 단위가 가정이어서 명절이나 어머니의 생일에 자립한 아이들이 찾아오는 가정 모임이 잘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결혼할 때 식장의 혼주 자리에 어머니를 앉히는 경우가 많고, 결혼 뒤 배우자·자녀와 함께 가정을 찾아와 피보다 더 진한 인연으로 맺어진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기도 한다.


대구마을의 10호집 어머니 김춘선(56) 씨는 부산진여상을 졸업한 뒤 8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머니를 선택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수녀가 될 생각도 했던 김씨는 28세이던 1987년 대구마을에 처음 와서 3년간 수련과정인 ‘이모’ 생활을 하다가 어머니가 됐다.


지금 기르는 아이들 중에 고 3인 남자아이는 미혼모의 자녀로 3세부터 김씨가 길렀다. 이 아이가 사춘기 때 부모를 너무나 보고 싶어 해서 함께 뿌리를 찾아다닌 적이 있다. 
수소문 끝에 만난 외할머니는 아이의 손을 잡고 “길러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했다. 
눈물을 훔치며 돌아선 아이는 “엄마, 내가 자립해서 돈 벌면 꼭 모시고 살 테니까 아무 걱정 말라”고 말해 김씨 또한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한국SOS어린이마을의 박상호(58) 상임이사 신부는 “뿌리가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당연한 일을 해왔을 뿐인데 아산상 사회봉사상이라는 큰 상을 받았다. 앞으로도 아이들에게 어머니를 통해 아동 친화적인 가정환경을 제공하고,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SOS어린이마을은 헤르만 그마이너 박사가 1949년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처음 설립했다.
우리나라에는 한국에 입국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선교사 하 마리아(Maria Hessenberger) 여사에 의해 1963년 대구에 설립돼 인본주의적 아동복지의 모델을 제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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