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23
- 부문 : 효행ㆍ가족상
- 소속(직위) : 서울
- 수상자(단체) : 정옥자
가족이기에 힘든 줄 몰랐던 지난 세월
아내이자 엄마 그리고 할머니는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아담한 체구의 정옥자(74) 씨는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남편을 9년 동안 돌보고, 유방암 진단을 받은 딸의 힘겨운 투병 기간도 함께 견뎠다. 2019년, 두 사람을 모두 떠나보낸 후 곁에는 사춘기 손자가 남았다. 생전에 미혼모의 권익과 자립을 위해 애써온 딸이 남긴 귀한 선물이었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손자는 할머니를 살뜰히 보살필 만큼 훌쩍 자랐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가족이기에 힘든 줄도 몰랐다고 말하는 정옥자 씨는 단단한 모습으로 이제는 자신을 위한 삶을 그린다.
<남편, 딸, 아들, 외손자와 함께 한 정옥자 씨 가족사진(왼쪽)>
아픈 남편과 미혼모 딸의 버팀목
“소독약, 소독기, 멸균거즈, 의료용 가위, 증류수 등 의료용품이 늘 한가득 있었어요. 처음에는 어떻게 간호해야 하나 무서웠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제가 나으니까요. 나중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따게 되었죠.”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던 남편의 추락 소식을 접한 건 2011년 추석쯤, 그때부터 정옥자 씨의 긴 병 간호가 시작되었다. 병원과 요양원도 거쳤지만 결국 집에서 남편을 돌보기로 결심하고 간호사에게 크고 작은 처치법부터 배웠다. 목 아래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전신마비 환자이기에 음식물 섭취와 대소변 처리는 물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자세를 수시로 바꿔주고 시간 맞춰 가래를 빼주는 일을 매일 반복해야 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건설 현장 일용직, 가사도우미 일을 가리지 않았다.
환자가 있음에도 집안에 그늘이 없었던 것은 딸의 역할이 컸다. 늘 밝고 야무지던 딸이 혼전임신으로 출산을 고집했을 때는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이기에 딸의 결정을 존중했고 2005년 귀한 손주를 얻었다. 딸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미혼모가 차별 속에서 숨어 지내야 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2009년 한국미혼모가족협회를 설립한 것이다. 초대 대표인 故 목경화 씨가 바로 정옥자 씨의 딸이다.
“당장 갈 곳이 없는 임산부를 데리고 오면 방 한 칸을 내주고, 낮에 일을 나가는 미혼모를 대신해 아이들을 맡아 돌보기도 했죠. 손주와 또래 애들이 우리 집에서 정신없이 노는 게 일상이었어요. 한번은 기저귀도 안 뗀 아이를 한 달 정도 돌봤는데 그새 정이 들더라고요.”
불안하고 힘든 시기를 지나는 미혼모들에게 정옥자 씨의 집과 품은 아늑한 쉼터가 되어주었다. 이는 세상을 바꿔 가는 미혼모 딸을 향한 엄마의 응원이기도 했다.
<외손자와 함께 한 정옥자 씨>
손자와 함께 그리는 행복의 꿈
2019년 6월, 정옥자 씨는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2017년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은 딸 목경화 씨가 2년 넘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입·퇴원을 반복하는 딸을 돌보는 일도 당연히 엄마인 정옥자 씨 몫이었다. 늘 긍정적이고 착한 딸이었기에 안타까운 투병이었고, 죽음은 더더욱 믿어지지 않았다.
“딸의 장례식에 정말 많은 사람이 찾아와 애도했어요. 그렇게 바쁘게 일만 하더니 얼마나 의미있는 일을 했는지 그때야 제대로 알게 됐죠.”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딸이 사망한 지 3일 만에 남편도 세상을 떠나자, 마음은 더욱 공허해졌다. 그게 병이 되었을까. 근 10년 동안 가족의 병시중을 도맡은 정옥자 씨에게 갑상선암이 발견되었다. 2022년 수술을 받고 아직 건강을 회복 중인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걱정하는 손자의 눈빛을 잘 안다. 할머니 걱정에 방을 몰래 들여다보고, 문을 열고 잘 테니 아프면 언제든 부르라고 당부하곤 한다. 감각이 둔해진 팔다리를 주물러주며 할머니밖에 없다고 말하고, 파스타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는 손자가 있기에 정옥자 씨는 다시금 힘을 낸다.
“이제 좀 살이 붙고 여유가 생겼어요. 손자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몸을 챙기며 나를 위해 살려고요. 일단 학교부터 다시 다녀야죠. 영어도, 수학도, 한문도 다시 배우고, 성지순례도 떠날 계획입니다.”
남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행복을 찾겠다는 정옥자 씨의 다부진 다짐, 그에게는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