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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재단, 2017학년도 장학증서 수여식 개최 등록일: 2017.02.21

아산재단 장학증서 수여식 개최

 

아산장학생 1,476명에게 장학금 50억 원 전달

의생명과학분야 장학금ㆍ생활비 지원 제도 신설

 

 

아산사회복지재단(이사장 정몽준)은 2월 23일(목) 오후 2시 송파구 풍납동 아산생명과학연구원 강당에서 2017학년도 아산장학생 장학증서 수여식을 개최했습니다.

 

이번 장학증서 수여식에서는 대학생 569명, 고등학생 660명, MIU(군인, 경찰, 소방, 해양경찰 등 제복을 입은 대원) 자녀 230명, 대학원 17명 등 총 1,476명에게 장학금 50억 원을 전달했습니다.

 

졸업 시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는 대학생 569명 가운데에는 ‘성적우수장학생’ 211명을 비롯해 올바른 봉사문화 확산을 위해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소외된 이웃과 나누는 ‘재능나눔장학생’ 154명, 육체적인 장애를 딛고 학업에 정진하고 있는 ‘다솜장학생’ 30명, 사회복지시설에서 성장하거나 갑작스런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학업중단 위기에 놓인 ‘나래장학생’ 124명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아산재단은 저소득가정의 고등학생들이 온라인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수강권과 교재를 지원하는 ‘e-learning 장학생’을 500명 선발하여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학업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습니다.

 

또한 아시아, 중남미 등 저개발국에서 자비로 국내 대학원 과정에서 유학 중인 외국인 10명에게도 등록금 전액을 지원하였습니다.

 

올해에는 의생명과학분야 대학원생 장학금과 장학생 생활비 지원 제도를 신설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의생명과학분야를 이끌어갈 우수인재 양성을 위해 국내외 대학원생 7명을 지원하고, 경제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등록금 이외에 생활비를 추가로 지원하여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올해 장학증서 수여식에서는 고졸신화의 주인공으로서 소년가장이라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행정고시와 입법고시를 합격하여 국무조정실장 등을 역임한 김동연 아주대 총장이 축사를 통해 역경을 헤쳐 온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장학생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산재단은 1977년 재단 설립과 함께 꾸준히 장학 사업을 펼쳐오고 있으며, 지금까지 3만 여 명의 학생들에게 총 608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인사말 전문>

 
<정몽준 이사장>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번 겨울은 꽤 추웠습니다만, 
이제 입춘과 우수가 지났으니 
우리가 기다리던 봄은 우리 앞에 와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학생들과 함께
장학증서 수여식을 개최하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바쁘신데 참석해주신 남궁진 전 장관님, 손숙·박정자 선생님 등
내빈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장학생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축하말씀을 드립니다.


장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참석해주신 
총장님들과 교수님들, 군과 경찰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장학생들을 선발하느라 애써주신 
장학자문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아산재단은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신 아버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씩씩하게 말씀하신 아버님은 한평생 꿈에 도전하신 분입니다. 


선친께서 가난과 질병의 악순환을 끊자고 하시면서
아산재단을 설립한 1977년은 
우리 사회에 복지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한 때였습니다.  


올해로 설립 40주년을 맞은 아산재단은
농어촌 주민들을 위해 강원도와 충청도, 영·호남 벽지에 종합병원을 세웠고, 
사회복지와 학술연구 지원사업을 펼쳐왔습니다. 


저희 재단은 다양한 장학제도를 통해서
매년 1,500여명의 학생에게
50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군인, 경찰관, 소방관, 해양경찰 등 제복 입은 분들(Men In Uniform)을

격려하기 위한 MIU 자녀장학생, 장애에도 불구하고 학업에 정진하는 다솜장학생,

아동복지시설에서 성장하거나 다문화, 조손가정의 자녀, 경제문제로 학업중단 위기에 놓인

대학생을 지원하는 나래장학생 등이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의생명과학 분야를 육성하기 위해 
의생명과학 대학원생 장학제도와, 
저소득층 대학생들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생활비 지원제도를 신설했습니다.


국가와 여러 기관의 장학금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장학금이 필요한 학생들과
생활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로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청년들을 묘사하면서 일자리가 부족해서
연애, 결혼, 출산, 취업, 인간관계,
심지어 희망까지 포기하는
‘N포세대’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우리 모두는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우리 재단의 장학금이 많지은 않지만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봄이 어느 결에 우리 곁에 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아버님께서 직접 쓰신 ‘새봄을 기다리며’라는 글을 나눠드렸는데요,

집에 돌아가시면 주위 분들과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업하느라 바쁘시면서도 어떻게 풍부한 감수성을 지니셨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글인데요, 
한 구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봄은 만인이 듣는 복음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봄은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온다.
춥고 음침한 긴 겨울을 힘겹게 견디어 낸 사람들에게 봄은 더욱 따스하다.
살며시 스며드는 봄은 자애의 어머니 같은 성품 그대로이다. 포근하고 훈훈하다.”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이
약동하는 봄기운을 받아
몸과 마음이 더욱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귀한 시간 내어 축사를 맡아주신 
김동연 아주대 총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김동연 총장님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소년가장으로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셨지만, 
행정고시와 국회 입법고시를 합격해
30여 년간 공직 생활을 하시며,
기획재정부 차관과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하셨습니다.


김 총장님의 좋은 말씀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축사 전문>
 
<김동연 아주대 총장>

 

우선 오늘 장학생에 선발된 학생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대단히 어려운 환경에서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조금 전에 정몽준 이사장님께서 제 소개를 해주셨듯이, 아마 많은 학생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는 현실에서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제게 축사를 맡긴 것 같습니다.


여기 보이는 사진은 1960년대 말 청계천 판자촌으로, 이곳이 제가 중학교 시절부터 살았던 무허가 판자촌입니다. 여기 있는 학생들은 잘 모를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서울에서 가장 빈민들이 모여 살던 무허가 판자촌이었습니다. 지금은 아주 맑은 청계천이 흐르고 있지만 당시에는 오염된 물이 흐르고 있었고요.


저희 집은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서 중학교 때부터 이곳에 살았습니다. 한 2~3년 살다가 이 집이 철거가 됐습니다. 갑자기 철거가 되어서 그 당시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 모두가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그 당시 허허벌판에 강제이주를 시켜 저와 저희 가족은 그곳에 천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그곳이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이라는 아주 평화로운 아파트 단지로 변해있는데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허허벌판에 천막촌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제가 4년 전 국무조정 실장으로 임명되고 나서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여기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나는 늘 다음 꿈을 꾸었다”. 사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은 아닌데 기자가 이런 제목을 뽑았습니다. 다음 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집이 너무 어려워서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졸업 때 취직시험을 봐서 취직을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직시험을 봐서 취업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만으로 17살의 나이였습니다. 여기 보시는 수험표가 제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첫 직장의 수험표입니다. 그래서 17세에 직장에 들어가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는데 타는 목마름이 있었어요. 저는 장남이었기 때문에, 제가 소년가장으로서 굉장히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타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이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집이 어렵다 보니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대학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야간대학이 많지 않은데요. 그 당시에는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아까 이사장님께서도 말씀해 주셨지만 고시라는 것이 있는 것을 알고 고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낮에는 직장, 저녁에는 대학, 밤에는 고시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 대학을 졸업하던 해 고시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공무원 발령을 받은 날이 첫 직장인 은행을 그만 둔 날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직장생활을 했던 거였죠.


그렇게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전윤철 전 감사원장님, 청와대에서 모셨던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님도 상사이셨습니다. 전 관직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 했던 예산실장 자리를 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예산이 350조였고, 지금은 약 400조 정도 되는데요, 예산실장은 350조의 예산을 편성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자리였고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러운 자리이자 또 힘든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차관, 장관까지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도 받았고 운도 좋았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말씀은, 아까 ‘다음 꿈’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했는데요. 여러분들도 그 다음 꿈을 많이 꾸셔야 하는데요. 그런데 저는 제가 그 꿈을 꾸면서 잃어버렸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청년시절 꿈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 그러면서 잃어버렸던 것들,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인생에 회의가 있을 것입니다. 제 경우에 제가 가졌던 가장 큰 인생의 회의가 30대 초반에 찾아왔습니다. 제가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아주 운이 좋게 미국에 유학 갈 기회를 잡았습니다. 여기 최종원 교수님이 계시는데, 저하고 미국 대학의 동문입니다. 정정길 이사장님도 동문이시고요. 제가 미시간대학교에 가서 박사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요. 참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물론 그때 제가 한창 공부할 시기였지만 두 학기 지나고 엄청난 회의가 찾아왔어요.


처음에는 그 회의의 정체와 이유를 몰랐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제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공부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생각한 것이 제가 공부하는 동안에 성적도 좋았고 장학금도 많이 받았고 모든 게 좋은 기회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왜 공부하는지 이유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제가 말할 수 있었던 답은 바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해를 했다는 뜻은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였다는 그 답이 공부를 왜 하는지에 대한 진정한 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고민을 해도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그때까지 살아왔던 인생을 되돌아 봤습니다. 30대 초반의 이야기로 여기 계신 장학생들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때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인생을 되돌아 봤더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게 진짜 내 꿈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혹시 내 꿈이 아니라 남이 보기에 좋은 길, 주위에서 보기에 좋은 길, 우리 사회에서 보기에 정답인 그 길을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니까 맞았습니다. 저는 남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남이 보기에 좋았던 길을 내 꿈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제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고, 진짜 내 꿈이 아니고, 남이 하고 싶은 일, 남의 꿈을 사는 게 그게 내 인생일까? 이게 혹시 남의 인생을 사는 게 아닐까? 내가 남을 대신해 살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까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의문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답은 굉장히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살아야 하고,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성적도 좋았고 모든 것이 좋았는데 따지고 보니까 성적은 전부 A학점인데 학기말에 가면 학점 말고는 머릿속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 옆에서 공부했던 미국인은 성적은 별로 안 좋았지만 여러 가지 능력이 생기는데 저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성적밖에 없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제가 그동안 해왔던 생활과 생각을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첫 번째는 공부하는 방법을 바꿨습니다. 그전에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성적을 얻기 좋은 과목, 그리고 수업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좋은 성적을 받을까를 고민했는데 그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한 어떤 과목, 그러한 게 아무리 힘들고 학생들이 기피하고 매주 세미나를 하고, A학점을 받지 못해도 좋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과목을 듣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그것은 익숙한 것들에 대한 결별이죠. 그동안 살아온 궤적이 성공적일수록, 남이 보기에 잘했다고 할수록, 자기 자신에게 익숙한 것과 결별하기 어려운 법이죠. 그렇지만 2년 반 정도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면서 내 자신의 틀을 깨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나니까 정말로 그 전에는 시험공부만 하던 것이 이제는 학문을 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것, 박사 논문을 쓰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다시 공무원으로 복직을 해야 했지만….


여러분에게 주어진 상황이 있을 거예요. 물론 그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야죠. 그건 ‘남이 낸 문제’입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 여건을 깨야죠.
‘반란’입니다. 


첫 번째 반란은 내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을 깨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반란은 자기가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상황을 자기가 만들어야합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는 게 필요합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필요한 거죠.


세 번째 반란은 사회에 대한 반란입니다. 그것은 사회가 낸 문제입니다.
주어진 여건은 환경이 낸 문제, 자신에 대한 반란은 자기가 낸 문제, 사회에 대한 문제는 우리 사회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답을 해야 합니다.


아까 정몽준 이사장님께서 1977년에 아산재단이 설립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여러분은 1977년에 정주영 설립자께서 아산재단을 만드신 취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시려는 노력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주어진 상황을 깨고, 사회가 만든 문제를 깨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의무입니다. 환경에 대한 변화, 자신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유쾌한 반란’을 일으켜야 합니다.


아산재단에서 아산장학생들에게 거는 기대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서 그동안 쌓아온 틀을 깨는 반란, 더 나아가 사회가 던진 질문 속에서 답을 줄 수 있는 것. 이것을 학생들에게 기대한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이 사회를 바꾸는 학생들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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