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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17
  • 부문 : 사회봉사상
  • 소속(직위) : 신명자 이사장
  • 수상자(단체) : 복음자리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해온 삶의 공동체

 

 

슈퍼마켓이나 대형마트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복음자리 딸기잼. 딸기 함유량이 높고 맛도 좋아서 동종 제품에 비해 비싼 편이다. 중산층 아파트단지가 밀집된 지역에서 특히 인기가 있다. 하지만 이 딸기잼이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개발하기 위해 쫓겨난 철거민들의 손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들의 사연을 알기 위해서는 1970년대 초 청계천으로 거슬러가야 한다.대학생이 한 명 있었다. 경남 고성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다니던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사회정의를 외치며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야학을 위해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온 이후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판자촌에서 사는 도시 빈민들의 참혹한 삶 앞에서 민주주의나 정의를 외치는 것이 위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의 신부가 있었다. 미국에서 온 파란 눈의 신부. 서강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면서 교수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청계천에 온 후 인생이 바뀌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복음을 외치는 것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청계천에서 주민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청계천에서 만나 죽을 때까지 같은 길을 걸으면서 평생의 동료가 됐다.


대학생은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불린 제정구(1944~1999년) 전 의원이고, 신부는 존 빈센트 데일리(John Vincent Daly)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훗날 귀화해 한국인이 된 정일우(1935~2014년) 신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다. 숙명여대 국문과를 다니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여성. 바로 신명자(64) 씨다. 그녀는 청년 제정구와 청계천에서 만나 결혼한 후 반려자 이자 평생 동지로 살아왔다. 현재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의 이사장을 맡아 먼저 세상을 떠난 제정구와 정일우 두 사람의 몫까지 함께하고 있다.


세 사람은 청계천 판자촌 주민들의 친구이자 이웃으로 살기를 희망했지만 철거라는 현실 앞에서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세 사람은 다른 지역을 찾았다. 그들이 옮겨간 곳은 안양천변의 양평동, 지금은 서부간선도로가 놓인 곳이다. 그들은 누가 누구를 돕거나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웃이 되어 살면서 웃고 울고 함께 어울리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도 철거 위기에 몰렸다. 정일우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독일 미제르올선교회에서 10만 달러를 지원 받아 경기도 시흥에 땅을 사서, 직접 집을 짓기로 했다. 가족 숫자가 많은 집, 이사를 많이 다닌 집 등 조금이라도 더 어려운 세대들로 1백70세대를 선정해 이주를 시도했다.


제정구 의원이나 정일우 신부는 무엇을 하든 주민들이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해서 일을 추진하도록 했다. 그래야 스스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주민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탄탄한 토대를 마련했고, 1977년 드디어 철거민들을 위한 새로운 삶의 터전인 ‘복음자리’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주민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신용협동조합도 만들었다. 1백 원짜리 동전 하나씩 걷어서 만들었던 신용협동조합은 조합원 2만 명에 자산 1천억 원이 넘는 규모로 성장했다. 탁아소와 공부방을 만들고, 장학회도 설립했다. 자활사업을 위해 포도밭을 매입해 포도를 재배하고 잼을 만들어 팔았다. 이후 딸기잼과 유자차로 확대했다. 자활사업 덕분에 주민들은 집을 지을 때 빌린 돈을 100% 갚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철거가 계속됐고, 집 잃은 철거민들이 계속 생겨났다. 제 의원과 정 신부는 복음자리 주민들이 갚은 돈으로 또 다른 공동체를 만들었다. 1979년에는 난곡 철거민을 중심으로 한독주택을, 1985년에는 목동 철거민을 대상으로 목화마을을 만들었다. 주민들의 연대를 위한 노력도 계속됐다. 작은자리회관을 만들어 도시빈민연구소와 공부방, 작은도서관, 토론장, 주민잔치 등 주민들의 교육, 여가문화, 교류의 장으로 활용했다.


복음자리공동체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공사례로 기록됐다. 복음자리부터 목화마을에 이르는 주거 사업에서도 전 주민이 집 지을 때 빌린 돈을 전액 상환했는데 이런 경우도 드물었다. 주민들 스스로 결정해서 살아갈 힘을 길렀다는 점도 복음자리공동체만의 특징이다. 1990년대는 1970~1980년대 같은 공동체운동 확산이 어려워지고, 제도권 내에서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복지사업을 전개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복음자리는 1996년 사회복지법인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작은자리종합사회복지관 등 3개 직영기관과 정왕종합사회복지관 등 6개 수탁 운영기관을 통해 가난한 주민, 결혼이주여성과 경력 단절여성, 저소득 노인 등 소외된 사람들이 역량을 강화하도록 도우며 공동체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판잣집은 없어졌지만 가난과 빈곤은 도시의 어두운 속살로 파고들어 더 깊은 생채기를 내고 있다. 복음자리공동체의 정신이 오늘날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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