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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에 대한 회상

다음의 글들은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와 오랫동안 교분을 나눈 분들이 아산과 함께한 일화를 회고하면서 아산에게서 느낀 감회, 그리고 추모의 마음을 담은 글입니다.

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시는 분 정진홍(아산리더십연구원장)

정주영 님의 1주기를 맞아 삼가 그 분을 추모하는 글을 적습니다. 실은 그 분의 크심을 유념할 때 이 일은 제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 분이 늘 찾아뵈어야 할 고향 어른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저는 우연한 일을 통해서 그 분을 뵙게 되었습니다. 15,6년 전인 듯한데, 어느 날 저는 아침 7시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현대그룹 비서실이라고 하면서 회장님께서 통화를 하고 싶어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아는 분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뜬소문대로 정주영이란 분은 저돌적이고, 인정사정 보지 않는 기업인이고, 그렇게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어떤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었습니다. 전화는 당신께서 그것을 읽고 공감을 했노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날 읽으셨다는 제 글은 ‘시적 기능과 산문적 기능’이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는데, 그 글을 환하게 뚫어 제 의도를 읽으시고 전화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그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자주 그 분을 만나면서 저는 그 분의 여러 모습을 뵈었습니다. 저는 그 분이 자상하고, 식견이 넓고, 사물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소탈하셨습니다. 마음의 결이 그러하셨고, 삶 또한 그러하셨습니다. 그 분의 따뜻함과 지성적임과 검소함은 제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분은 제게 언제나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사람 키만큼 높이 쌓인 고향 통천의 눈 이야기를 즐기셨습니다. 어느 여름 그 분을 따라 강화도에 가면서 저는 그 이야기를 한 시간이 넘도록 들었습니다. 아버님과 땅을 일구시던 이야기도 자주 하셨습니다. 당신 아버님에 대한 추억은 무척 아픈 여운으로 그 분의 삶 속에서 메아리 쳤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저는 그 분이 바다를 바라보시다가 저를 향해 혼잣말처럼 ‘서울에 가기 싫은데’하고 툭 던지신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제가 기억하는 그 분은 경제 거인도, 정치 거인도 아닙니다. 다만 소박하게 감상적(感傷的)이고 낭만적인 한 어른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이 부닥치며 헤쳐 나오신 현실은 냉혹한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 마음결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직면한 정황을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도식을 통해 극복하면서도 오히려 ‘감상적 성찰’이라고 해야 옳을 직관을 통하여 상상력의 세계에 뛰어들어 그 사태를 꿈의 실현으로 이어나가셨습니다.

 

그 분의 그러한 감상은 현실을 언제나 ‘열려진 가능성’으로 전제하는 그 분의 힘의 원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의 커다란 문제 중의 하나는 ‘상상력의 고갈’입니다. 비판적 논리, 분석적 이해가 삶을 재단하는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상상력조차 생산적인 효용과 연결된 한에서 유의미할 뿐입니다. 당연히 상상력의 원천인 감상이나 낭만은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분이 꿈 꾼 세상은 소박한 감상이 통용되고 낭만이 숨쉬는 그러한 곳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살이가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듣고 이해한 그 분의 이야기는 그러한 정서를 담고 흐른 긴 강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사시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꿈만을 따라가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의 꿈은 ‘눈감은 꿈’이 아니라 ‘눈뜬 꿈’이었습니다. 이룩하신 일들이 이를 실증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러한 삶을 순전하게 받아드리기에는 너무 뒤얽혀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긴 삶을 살아도 한 평생이란 낭만에서 비롯한 꿈을, 낭만이 살아있는 현실로 만들기에는 너무 짧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소 떼를 몰고 북녘을 향해 가시던 그 분의 모습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때 그 모습처럼 그 분의 삶과 인간을 드러낸 일은 없는 듯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당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당신이 마무리 하시기에는 너무 늦은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의 실현은 그 분 이후 세대에게 지워진 지고한 사명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바뀜이 급합니다. 어쩌면 그 분은 당신 세대의 마지막에서 그 정점을 사시고 사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분은 기억되고, 해석되어야 하고, 그러한 차원에서 의미의 실체로 전승되어야 합니다. 꿈속에서 꿈을 실현하고, 여전히 꿈속에 머물 수 있는 인간의 한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수록 그 분은 이미 살아생전에 그러셨듯이 이후에도 불변하는 새로운 가치의 원천으로 살아 계실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곧 문안을 여쭈어야 할 듯한데 너무 멀리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꿈을 이루는 현장에 늘 그 분은 같이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 이 글은 2002년 정주영 초대 이사장의 1주기 추념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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