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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나 "너희는 세계의 빛이다" 김재규


나는 1989년 9월 1일, 서울 현대고등학교의 제3대 교장에 임명되었다. 그 자리는 ‘운동’ 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내가 교장이 된 뒤 “초등학교만 나온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가 역시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당신을 어여삐 여겨 교장을 시켜주신 것 아니냐?”는 주변사람들의 농담이 있었을 정도로 나와 설립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 해 8월 초로 기억한다. 현대그룹 비서실로부터 “설립자께서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신라호텔 음식점으로 나갔다. 어디에서 제 소문을 들으셨는지 대뜸 현대고 교장을 맡아달라고 하셨다. 당시 서울 경동고 교장이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 없다며 사양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사투리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경상도 사투리를 고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설립자께 “제가 다른 건 꿀릴 게 하나도 없지만, 이 사투리 때문에 안 되겠습니다. 현대고가 위치한 압구정동은 우리나라 문화의 중심지인데, 교장이 사투리를 쓰면 아이들이 잘 따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설립자께서는 껄걸 웃으시더니 “사투리 때문이라면 문제 될 것 하나도 없다”고 하시면서 함께 일하자고 하셨다. 그 자리에서 교장 임명이 결정된 것이다.
나는 문교부 공무원을 거쳐 고등학교 교장을 하고 있었으니, 설립자처럼 쟁쟁하신 분을 뵐 일이 없었다. 이날 설립자를 처음 뵌 것이었다.

그날 설립자는 심현영 당시 현대산업개발 사장과 뒤에 교육부 총리를 지내게 되는 이상주 교수와 함께 계셨다. 당시 울산대 총장이었던 이상주 교수는 내가 서울대 사무국장일 때 서울대 사범대 교수를 지내서 안면이 있었다. 교육이론에 관한 한 이 교수만 한 분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이 교수가 동석한 걸 보고 ‘저 분이 나를 추천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설립자에게서는, 다른 분들도 많이 하는 얘기이지만, 참 검소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분이라는 첫인상을 받았다. 아울러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 앞에선 딱 할 말만 해야지, 그 이외의 말을 하면 실언이 되고 그래서 그 분이 신뢰하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현대고 교정에 새운 ‘창학정신비’

이렇게 교장이 된 뒤인 1990년 5월 3일, 나는 현대고 화단에 커다란 화강암으로 ‘창학정신비’를 세웠다. 이 비문(碑文)을 세운 이유가 있다. 교장이 돼서 학교에 갔더니 손님들이 참 많이 왔다. 현대그룹 총수가 세운 학교여서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왔다. 그런데 학교를 방문한 손님들은 한결같이 설립 취지를 물었다.

현대고에는 이미 ‘설립취지문’이라는 것이 있긴 했다. ‘우리 현대고등학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사랑과 믿음, 진취적 기상, 근면과 겸허를 실천하는 전인교육의 장으로 설립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설립자의 종교는 불교가 강한 다신교로, 기독교인이 아니신 건 분명한데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학교를 설립하셨다고 설명하려니까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1985년부터 서울현대학원 운영을 책임지고 계신 장정자 이사장님 입장에서 보면, 이사장님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시니까 설립취지문이 맞다. 하지만 현대고를 설립자께서 세운 건 천하가 다 아는 일이어서 내가 이사장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올바른 지적이다”라고 하신 뒤 창학 비문을 새로 만들라면서 250만원인가를 주셨다. 이사장님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보며 ‘되는 집안은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잘 알려진 얘기지만, 이사장님은 설립자께서 특히 자랑스러워 하시던 넷째아우(정신영・1962년 독일 유학 중 31세에 사망)의 부인이시다. 설립자께서 학교 운영을 맡겼으니까 자신의 종교관을 설립 취지에 반영해도 누가 뭐라고 안 할 텐데, 시숙인 설립자의 창학관을 반영하는 게 옳다고 여기신 것이다. 난 이게 참 아름다운 마음씨라고 생각했다.

이사장께 받은 돈으로는 ‘창학정신’을 새길 5톤짜리 화강암을 샀다. 우리 서무과장 등이 충청북도 단양에서 구입한 그 화강암은 현대건설에서 운반해 주었다.

화강암에 새긴 창학정신은 현대고 교사들이 먼저 내용을 만든 뒤 설립자의 결재를 받아 완성했다. 집단창작인 셈이다. 현대고에 서 국・영・수를 가르치는 교사는 명문대를 나오지 않고선 아이들을 지도하기 어렵다. 우선 우리 학교 국어 선생들로 설립자의 삶을 연구하는 모임을 만든 뒤 여덟 차례의 심의를 거쳐 창학정신의 시안을 만들었다. 이 중 한 번은 교육학자이면서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던 서울대 김종서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렇게 완성한 것이 188자로 이루어진,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創學精神(창학정신) 젊은 시절, 어느 學校 工事場(학교 공사장)에서 돌을 지고 나르며 바라본 학생들은 學校敎育(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에게 한없는 부러움과 憧憬(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때 이루지 못했던 배움에 대한 갈망이 여기에 배움의 주춧돌을 놓게 하니, 비로소 젊은 날 나의 꿈 하나가 結實(결실)을 맺게 되었다. 向學(향학)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이 배움의 터전에서 淡淡(담담)한 마음을 가지고 開拓(개척)의 精神(정신)과 創造(창조)의 能力(능력)을 갈고 닦아 世界(세계)의 빛이 되기를 바란다. 1978년 4월 29일 現代高等學校 設立者 鄭周永(현대고등학교 설립자 정주영)’
현대고의 교훈인 ‘너희는 세계의 빛이라’는 바로 창학정신의 마지막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7년 동안 투자해서 지은 학교

설립자께 시안을 보고 드리러 갔을 때의 일이다. 집무실에서 시안을 두 번쯤 훑어보시더니 기막히게 오자를 잡아내셨다. 우리는 보고용 시안을 만들면서 수많은 검토를 했다. 그런데 첫째 문장의 ‘한없는’이 ‘한없이’로 오타가 나 있었다. 이걸 집어내신 것이다. 어문 전공은커녕 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분이 이런 오자를 잡아내는 걸 보고 정말 놀랐다. 게다가 맨 마지막 문장을 우리는 ‘…되기를 믿는다’로 만들었는데 쑥 훑어보신 설립자가 ‘…되기를 바란다’로 고치셨다. 그러고 보니 ‘믿는다’보다는 ‘바란다’가 뉘앙스가 훨씬 좋았다.

설립자의 교열작업을 보면서 ‘뭔가를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은 역시 번뜩이는 영감을 타고나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글자 한 자 고치는 것이나 조선소를 만드는 거나 그 창조의 뿌리는 결국 같은 것 아닐까.
창학정신 시안을 결재 받으면서 글씨를 쓸 방법도 함께 보고했다. 설립자께서 직접 쓰시는 1안, 이사와 교직원 등 여러 사람이 쓰는 2안 그리고 당대 명필에게 맡기는 3안을 말씀드렸더니 설립자께서 서슴지 않고 “두 번째 것!” 하셨다. 화강암에 새길 창학정신188자를 설립자와 법인이사, 부임 순서에 의한 교직원 그리고 미화원과 수위 등 58명이 한 단어씩 나누어 쓴 전무후무한 비문은 그렇게 탄생했다. 비문에 새겨진 글씨체가 제각각인 건 그래서이다. 다양함 속에서 조화를 찾으려는 설립자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담겨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비문 제목인 ‘창학정신’과 마지막의 ‘정주영’은 설립자의 글씨다. 장정자 이사장님은 마지막 문장의 ‘담담한’을 쓰셨고, 나는 설립자 이름 앞의 ‘현대고등학교’를 썼다.

고려대 교무처장이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창학정신비에 관한 설명을 듣더니 “정말 걸작품”이라고 감탄했다. “신분이 높은 이부터 낮은 사람까지 학교의 모든 구성원이 비문에 글씨를 새기는 그런 발상을 아무나 할 수 있겠느냐?”고 몇 번을 되물었다. 창학정신비는 커다란 화강암이므로 아무리 풍화작용을 거친다고 해도 천 년은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창학정신비를 세우자 울산 현대고등학교 등에서도 유사한 비문을 건립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고 자리의 땅값은 당시 평당 1,500만 원쯤이었던 걸로 안다. 그런 금싸라기 땅에 현대고를 지을 돈으로 다른 곳에 학교를 건립했다면 적어도 10개의 고등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설립자가 현대고를 세운 건 못 배운 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설립자는 인천에서 부두 노동을 하다가 지금의 고려대학교인 보성전문학교가 도서관을 지을 때 그 현장에서 돌을 져 나르기도 했다. 같은 나이에 누구는 전문학교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고, 누구는 막노동을 하는 대조적인 현실에서 못 배운 한을 절실히 느끼셨을 것이다.

학교법인 서울현대학원이 설립 허가를 받은 게 1978년 4월 29일이다. 그리고 제1회 입학식을 한 게 그로부터 7년 뒤인 1985년 3월이다.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7년 동안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해 지은 학교가 현대고등학교인 것이다.
현대고의 복도 너비는 385cm이다. 보통 중・고등학교 복도의 두 배다. 대학에도 그런 복도가 없다. 설립자의 스케일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설립자는 다른 학교들보다 한 세기는 앞선 시설을 갖춘 학교를 세우라고 강조하셨다. 설립자의 그 같은 의지가 반영돼 있는 곳이 냉・난방 설비를 갖춘 도서관과 현대적인 과학실습실 그리고 컴퓨터실 등이다.
1980년대 중반에 냉・난방이 되는 고교 도서관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나? 이러니 학생들이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했던 것이다.

앞까지 배웅하던 설립자

그때는 고교 평준화가 돼 있을 때여서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률은 월등히 높지 못했고, 여느 고등학교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우리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기대하는 건 명문대 진학보다는 커뮤니티 형성이었다고 본다. 현대고 출신 선후배들의 인적 네트워크가 그때부터 사회 각계각층에서 광범위하게 쌓여갔기 때문이다. 내가 현대고 교장을 4년 반 했는데, 우리 학생들은 가정교육이 잘 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기 실린 사진 중에는 설립자께서 현대고를 방문한 사진들이 있는데, 그건 1992년 5월 25일의 일이었다. 설립자께서는 바쁘시기도 하지만 장정자 이사장님이 계시니까 학교를 찾을 일이 거의 없으셨다. 내가 교장이 된 뒤 “설립자께서 학교를 한 번 방문해주시면 교직원과 학생들이 자긍심을 가질 것 같다”는 요청을 꾸준히 했는데, 그 꿈을 이루어주신 것이다. 그날 설립자는 길 건너편의 광림교회에서 현대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하셨다.

교장을 5년 가까이 했는데 설립자나 이사장님이나 한 번도 간섭한 일이 없었다. 사립학교에서는 어떤 교사를 채용하라든가, 남는 학교 경비를 전용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현대그룹에서 설립한 학교니까 돈 문제는 제쳐놓더라도 교사 채용을 놓고 간섭하거나 압력을 넣으면 거부하기가 어려운데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사실은 이게 사립학교를 운영하는 본연의 자세다. 설립자도 그렇지만 이사장님도 참 훌륭하신 분이다. 이사장님이 제일 금기로 여기시는 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찾아오고, 얼굴 비치는 일이었다.

나는 학력이 짧은 분들과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설립자는 보통학교 졸업 뒤 부기학원을 다녀서 나보다 학력이 몇 달 더 높다. 나는 현대고 교장에 이어 영동대학교 총장을 맡게 되는데, 영동대를 세운 이사장은 여자(김맹석)로서, 초등학교를 2년 반 다닌 게 전부여서 나보다 학력이 낮다. 대학 총장을 하려면 명예박사학위라도 하나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게 없어서 자격이 안 된다고 사양했는데, 이사장뿐 아니라 딸과 대학 교수인 사위까지 온가족이 나서서 간청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가기로 결정했다.

설립자께 이임 인사를 드리기 위해 계동의 집무실로 찾아뵙고 이런 말씀을 드렸다. 대기업의 아침은 무척 분주하다. 결재를 받으려는 임원들이 집무실 밖에 줄지어 기다리고 있어서 비서가 보고를 하면 “내가 지금 중요한 사람과 얘기 중이니까 오지 마”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셨다.

내가 무슨 중요한 사람인가? 참 민망하면서도 정말 감사했다. 헤어질 때도 엘리베이터 앞까지 함께 와서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송해주시던 설립자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정리 유인종 편집부)

※김재규(金在奎) : 1927 경남 합천 출생. 용주초등학교 졸업. 중졸자격시험, 초・중・고 교원자격시험, 행정고시 합격. 문교부 보통국 국장, 중앙교육연수원 원장, 여의도・경동・현대 고등학교 교장, 영동대학교 총장 역임. <교육공무원법정의>, <문교법전> 출간. 김영휘교육상, 국민훈장동백장 수상 및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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