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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향기 강릉 해살이마을의 '전통 가꾸기' 이선희

봄의 산야는 마치 멀미가 일어날 듯 보오얗고 아련하다. 있는 힘껏 수액을 끌어올리는 나무들의 힘찬 펌프질 소리에 맞춰 아지랑이들 함성으로 화답하는 들길로 나서면 꽃과 잎이 없어도 봄을 실감하게 된다.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북강릉 나들목에서 강릉방면 7번 국도로 빠져 10분 남짓 차를 달리다보면 마을을 병풍처럼 두른 백두대간 준령 사이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는 해살이마을 또한 긴 겨울나기를 끝내고 봄단장에 분주하다.

‘해가 사는 마을이라 해살이마을일까, 이름도 참 이쁘네!’ 생각했던 이곳은 행정구역으로는 강릉시 사천면, 200여 년 전쯤 막사발 사기그릇을 만들던 움막이 많았다 하여 ‘사그막골’ 또는 ‘사기막리’로 불리던 곳이다. ‘해살이’란 이름은 2년 전 마을의 브랜드 이미지 작업 끝에 탄생했으며 창포의 옛 이름 ‘해살이(해답이)풀’에서 따왔다고 한다.

개두릅축제, 단오제 등이 새순처럼 움트는 마을
이 마을의 대목철은 바야흐로 봄! 개두릅축제가 열리는 4월 27일부터 5월 5일 단오제 전후면 사람들의 방문이 절정에 이른다.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 매끄러운 머리에 액운을 물리친다는 창포뿌리비녀를 꽂아보며 수리취를 짓이겨 멥쌀가루에 넣고 찐 반죽을 떡메치기로 으랴차차 쿵덕 쿵쿵 쳐내 수레바퀴 모양을 낸 수리취떡을 만들어 먹는 등 옛 전통을 체험해보고자 작년에만 8천여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처음에는 강릉의 단오제가 유명해 ‘단오마을’로 붙일까도 했지요. 하지만 이곳에선 창포가 많이 나는데 햇빛만 봐도 잘 자라고 생명력이 강한 풀로서 농부들의 일생과도 무척 닮아있지요. 그래서 마을 이름을 ‘해살이’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농촌전통테마마을 추진위원장이자 이곳 이장 일을 보고 있는 권오완 씨(47)의 설명이다.



하지만 지금은 개두릅도 창포도 싹을 틔우기 전의 이른 봄. 저마다 생업에 바빠 적막했던 이곳이 활기를 되찾는 시간은 저녁이다. 작년 9월부터 화, 목요일 저녁이면 이곳 마을주민들이 폐교를 단장해 만든 전통문화체험학교를 찾아 사물놀이와 관노가면극을 배우는 것이다. 특히 목요일에는 관노가면극전수자인 안병현 씨가 찾아와 가르치기 때문에 더욱 열기가 높다. 마을을 한바퀴 돌고 오자 장대비가 쏟아지는 듯한 사물놀이 소리가 교실 안을 후끈 달구고 있다. 오늘은 청년회보다 부녀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출동해 지신밟기 소리와 대보름날 강릉 단오터에서 공연할 관노가면극 연습이 한창이다.

“에루 지신이아~ 동방에는 청재지신, 에루 지신아~/ 남방에는 적제지신, 에루 지신아~/………(중략)/오방 지신을 눌리세/만복은 들어오고 오방가신을 누리세/잡귀잡신을 물알로~”

리허설을 겸한 막바지 연습이라 관노가면극을 연기하는 사람들은 진지하기만 하다.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2005년)되기도 한 강릉지방의 무언극인 관노가면극 공연엔 양반광대, 소매각시, 장자마리 2인, 시시딱딱이 2인, 악사 등 최소 17명이 필요하다.

가면극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장면. 소매각시가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는 양반광대의 수염을 감고는 자살소동을 벌이고 있다. 각시가 픽 쓰러진다. 그런데 방향이 틀렸다. 사람들이  웃으며 훈수를 둔다.
“다시, 다시! 아니 왜 악사 방향으로 쓰러져요. 반대방향인 관객 쪽을 향해 넘어져야지!”

현풍 곽씨 집성촌이기도 한 이 마을에서 항렬이 높아 ‘젊은 아재’로 불리는 이곳 터주대감 곽기탁 씨(37·테마마을 추진위 사무국장)는 “강릉 내에는 관노가면극회가 16개가 있는데 우리 팀이 유일한 남녀 혼성팀이죠. 2006년 9월 창단돼 역사는 짧지만 벌써 강릉시청의 초청으로 제야의 밤 공연을 하는 등 2회 이상 외부공연을 가졌습니다.”라며 자랑에 열을 올린다.

가면 안에서 소매각시역을 연기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던 이순규 씨(51)가 탈을 벗는다. 그는 강릉시내에 살다 10년 전 이곳에 남편 김명환 교수(강릉대)와 함께 이주해온 이농가구민이다. 마을 일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참여하는 그이는 “자식들에게 재산보다 추억을 물려주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 농촌생활을 결심했어요. 아파트에 살았으면 벌써 우울증이 걸렸을 텐데 이곳에서는 항상 새로운 것을 보고 접하며 살게 되네요. 너무 행복해요.”라며 함박웃음을 머금는다. 강릉대 김경숙 학장(사학)도 이곳에 산다. 백두대간 대관령 곤심봉을 중심으로 148가구 386명이 울멍줄멍 등을 비비며 살아가는 제법 큰 마을 안에 이들을 포함, 농사를 짓지 않는 가구는 20여 호 정도. 대부분은 농사를 주업으로 살아가며 마을주민들은 송이작목반, 개두릅작목반, 부녀회, 청년회, 노인회, 테마마을 주민회로 나뉘어 저마다 테마마을 일꾼으로서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함께 이 마을을 찾은 건국대 환경과학과 김재현 교수는 이 마을의 저력은 ‘젊은이가 많은 것’이라 촌평한다. “40~60대 중장년층이 60%쯤 되는데, 리더도 젊고 그를 도와 일할 젊은 후계자들도 많으니 다른 마을에 비해 월등한 경쟁력을 갖춘 셈이죠.”

산, 바다, 계곡을 낀 천혜의 자연조건 다채로운 체험 가능해
이 마을의 또 다른 장점은 산, 바다, 계곡, 논밭 등 풍부한 천혜의 자원을 바탕으로 연중 갖가지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연산 송이는 이 마을의 특산품. 수달이 산다는 맑디맑은 용연계곡을 낀 산으로 오르자 명주실꾸리에 제문을 꿰어놓은 굴참나무 밑의 제단터가 보인다. 기껏해야 한평 남짓 될까. 아궁이를 낀 구들장에 불을 때면 금방이라도 연기가 폴폴 오를듯한 굴뚝, 찬장이며 식탁까지 오밀조밀 공들여 꾸며놓은 송이꾼들의 산막들이 이채롭다. 권오완 이장(47)은 이곳에 말을 타고 트래킹을 할 수 있는 관광코스를 만들고 싶다는 의욕을 슬쩍 내비친다. 그는 태풍 로사 피해로 실의에 잠긴 주민들을 북돋아 2005년 농촌진흥청에 농촌전통테마마을을 신청한 뒤 주민들과 합심해 여러 가지 일들을 벌여왔다.

한전 송전탑 건설로 입은 송이 피해액 2억2천만 원을 마을 기금으로 삼아 솟대 만들기 공방 및 단오체험을 할 수 있는 4천여 평의 해살이마당을 만들고 움벵이골 농사체험장, 곤충체험장 등도 조성했다. 봄이면 창포머리감기와 수리취떡 만들기 행사를 비롯해, 개두릅 순 따기, 고사리꺾기, 미꾸라지잡기 등을, 여름이면 계곡천렵, 감자전 감자송편 만들기, 해살이 산골음악회 등을 열어 관광객들을 유치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마을 수입이 작년에 2억3천만 원. 마을에 심은 엄나무 묘목을 팔아 1억 원 이상, 엄나무 순따기 행사를 벌여 7천여만 원, 개두릅축제 및 단오향토음식점 등으로 3천여만 원, 민박 운영 등을 통해 3천여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1촌 1사 운동에 동참, 스타키보청기 회사와 자매결연을 맺어 이곳을 방문한 직원 가족들과 함께 김장을 담그고 마을 노인 열분에게 보청기 선물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자산이 는 것보다 마을에 활기가 살아난 것이 그에겐 무엇보다 큰 기쁨이다. 마을 사업들이 알려지며 강원도 내 새 농촌건설운동우수마을로 뽑혀 2006년에는 5억원의 상금도 탔다. 권 이장 또한 마을가꾸기 경진대회 우수활동 지도자로 뽑혀 얼마 전 상금 6천만 원을 받았다. 개인상금이었지만 그는 이 돈을 마을을 위해 다시 쏟아 부었다. 체험학교에 징이며 장구 등 악기를 구입해주고 관노가면극 기금에 보태는 한편 젊은 사람들과 유럽 농촌견학여행도 다녀왔다. 그렇게 찾은 유럽에서 스위스 루체른다리를 인상 깊게 본 그는 해살이마당과 사기천변을 연결하는 ‘지붕 있는 나무 목조다리’를 건설하기로 마음먹고 설계에 들어갔으며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기도 하다. 머지않아 마을의 명물이 될 거라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이다. 마을 머슴을 자임하는 이장으로서 힘든 일도 많지만 마을에 대한 못 말리는 애정이 그를 살게 하는 또 다른 힘이다.

그를 따라 이 마을 체험 중 가장 인기가 높다는 솟대만들기 체험 공방으로 들어선다. 마을 토박이 곽대진 씨(56)가 공방을 운영하는데 이곳 특산물인 오죽을 이용해 만든 솟대는 취미라고 하기에는 예술성이 높다.

“어렸을 때 재미로 만들던 솟대를 테마마을 시작하면서 다시 재현해봤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하네요. 얼마 전에는 쪽동백을 이용해 둥지모양의 솟대를 만들어 특허를 내기도 했지요. 공방이 활성화되면서 작년에 5백여만 원의 수익을 냈고요. 강릉교동초등학교에서만 5백여 명의 학생이 다녀갔는데…. 그러다보니 더 재미가 나 새로운 것들을 개발하게 되네요.”

곽씨는 솟대체험을 진행할 때면 다산과 풍요, 기다리는 마음들을 담아 어업 하던 사람들이 신앙처럼 작업하던 또 다른 강릉의 상징 ‘진또배기(하늘기둥)’의 유래를 꼭 이야기해준다고  말했다. 아직은 진행형이지만 강릉문화권 안에서 강릉을 지켜내려고 애쓰며 새순처럼 피어나고 있는 마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마음 따뜻한 행복이었다. 어디선가 두릅향을 머금은 봄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듯, 향긋한 향기에 취한 봄밤이 어느덧 저물고 있었다.

 ※ 해살이 마을  http://haesari.go2vil.org 033-648-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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