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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밥 한 끼에 행복이 있다” 유인종

※ 곽병은 원장 : 1953 경기도 이천 출생. 서울 불광초, 대신중・고, 중앙대 의학과, 중앙대 대학원 의학과(의학박사), 상지대 사회복지정책대학원(사회복지사 1급), 가톨릭대 대학원(문학박사-사회복지학) 졸업. 국군원주병원(군의관)・원주가톨릭병원 근무, 원주교도소 의무과장 역임. 1989~2013 부부의원 운영. 현재 밝음의원 근무 중. 1991 갈거리사랑촌 개원. 1996 갈거리사랑촌을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에 기증. 1997 십시일반(무료급식소) 개원. 1998 원주노숙인센터 개원. 1999 봉산동할머니의 집(독거노인 임대지원) 개소. 2004 갈거리협동조합 창립. 대구가톨릭 사회복지대상, 원주시민대상, 원주시민운동가상, 보령의료봉사 대상, 대한민국 인권상 등 수상.

곽병은(60) ‘갈거리사랑촌’ 원장은 차림새가 무척 검소하다. 원주의료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밝음의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이기도 한 그의 옷차림은 소박하다 못해 허름할 정도이다.

지난 10월 말, 인터뷰를 위해 진료실에서 만났을 때 그는 베이지색 면바지에 갈색 남방 차림이었다. 의사를 상징하는 흰색 가운은 평소에 입지 않는다고 했다(옆방에서 진료하는 동갑내기 부인 임동란 씨 또한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가운은 입고 있었다). 신발은 운동화였는데, 제조사가 프로월드컵도 아닌 월드컵이었다. 저런 운동화를 어디에서 살 수 있나 싶어서 인터뷰 중에 자꾸 눈길이 갔다.

인터뷰를 마치자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단골식당에 가서 식사하자고 권유하더니 입은 지 오래 된 듯한 베이지색 점퍼를 걸쳤다.

단골식당은 원주시 중앙동의 재래시장인 ‘전통시장’ 안에 있었다. 시장으로 향하며 10여분 걷는 동안 그는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다가와 손을 잡으며 “원장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다(중앙동에서 20여년간 아내와 함께 ‘부부의원’을 운영한 탓에 그는 ‘원장님’으로 불렸다).

“부자 의사는 되지 말자”
노동으로 거칠어진 그들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아주는 그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키가 큰 그가 굵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별일 없으시죠?” 허리 숙여 인사하며 따듯하게 손을 잡아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에게서 인사를 받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시장에 들어섰을 때도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를 본 상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건넸다.

단골식당은 전통시장의 35호점인 ‘예진네’였다. 그와 함께 먹은 음식은 4천 원짜리 칼만두. 칼국수에 김치만두를 넣은 메뉴였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그는 늘 이곳에 와서 점심식사를 해결한다고 했다.

그는 1979년 결혼한 직후에 아내로부터 다짐을 받았다.
“우리는 보통 의사 수준으로 살자. 화려한 의사, 부자 의사는 하지 말자.”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욕심 없는 아내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따라주었다.

두 명의 아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유산을 절대로 물려주지 않는다. 집과 병원을 너희에게 주지 않는다. 대신 공부는 원하는 대로 시켜주겠다”고 주입시켰다.
물려받을 재산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두 아들은 학업 기간이 긴 편이다. 장남(종규・34)은 상지대 영문과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 가서 미주리대학 통계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에서 회사에 잘 다니더니 느닷없이 퇴직하고 요즘은 다시 의과대학에 들어가겠다며 공부하고 있다. 한양대 생물학과를 마친 차남(준규・31)은 의학전문대학원 시험을 몇 번 봤다가 안 된 뒤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원장을 맡고 있는 ‘갈거리사랑촌’은 1991년 원주시 흥업면에 8,260㎡(2,500평)의 부지를 마련해 개원한 시설이다. 평소 꿈꿔온, 갈 곳 없는 노인과 장애인의 공동체였다. 당시 5천여만 원을 들여 구입한 이 부지는 지금 10배 이상 올랐다. 이 시설 전체를 그는 1996년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에 기증했다.

“갈거리사랑촌은 처음부터 내 소유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기회가 닿으면 사회복지법인에 넘길 생각이었는데 제가 가톨릭신자(영세명 안토니오)이기도 하고, 가톨릭 교단이 그래도 깨끗하게 운영할 것 같아서 기증했지요.”

원주는 ‘장일순’이라는 사회운동가가 활동한 지역이다. ‘한살림’을 창립한 고 장일순 선생은 서예로도 유명한데, 그의 서예 작품은 한 점당 50여만 원을 호가한다. 곽병은 원장은 장일순 선생의 작품을 70여점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 또한 장일순 기념관이 만들어질 때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
“저는 지금 살 만큼 사니까 그 이상은 필요가 없어요. 먹고 살만하고, 집 있고, 차 있고, 애들 다 교육시켰고, 그럼 됐지 뭐가 더 필요할까요?”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청빈한 삶으로 원주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곽병은 원장은 1953년 경기도 이천에서 3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남의 집에서 머슴도 살고, 장돌뱅이도 하며 생계를 이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자립심이 강했던 그의 아버지(곽한근・2004년 사망)는 이런 처지를 딛고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11회) 의사가 되었다.
반면에 어머니(한경순・85)는 초등학교만 마쳤다. 그의 할아버지의 강권에 의한 중매결혼이었다. 학력 차이가 커서 어머니는 결혼 초기에 아버지에게 구박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서울 독립문 부근의 한격부 외과병원 등에서 근무한 그의 부친은 현저동에 현저병원(지금의 세란병원 자리)을 개원했는데, 이때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에 와서 장충초등학교를 거쳐 불광초등학교와 대신중・고를 졸업했다.
부친이 의사여도 그의 집안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워낙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기도 했지만, 부친이 걸핏하면 이른바 ‘똥골’로 불리던 영천과 무악동의 달동네 주민들을 무료 진료한 탓이 컸다. 부친은 이것도 모자라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기도 했다. 부친의 생활 태도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부친은 장남인 그가 의사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의사는 너무 힘들다며 농대에 진학해 나무를 키우라고 권했다. 부친처럼
봉사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던 그는 몰래 중앙대 의대에 원서를 내서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전하자 부친은 “할 수 없지” 하며 담담하게 말하고 말았다.
정작 기뻐한 곳은 그의 모교인 대신고등학교였다. 의대생을 처음 배출한 사실이 기뻤던 교장 선생님은 그에게 양복을 사주겠다고 했을 정도이다.
1977년 중앙대 의학과를 1회로 졸업한 그는 국립원호병원(지금의 보훈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거쳤다. 그가 레지던트를 할 때 이화여대 의대를 마친 지금의 아내가 인턴으로 들어와서 교제를 시작했고, 1979년 결혼식을 올렸다. 거짓말을 못 하는 그는 “예쁘고, 성격 좋아서 첫눈에 반했다”면서 “제게 과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1984년부터는 국군원주병원에서 3년간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군의관 시절은 아무 연고가 없던 원주에 뿌리를 내린 시발점이 됐다. 제대 뒤에는 다시 원주 가톨릭병원에서 3년간 일했고, 1989년 1월 원주시 중앙동에 아내와 함께 부부의원을 열어 올해 2월까지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련의 생활을 할 때부터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경기도 안양의 성나자로마을에서 3년간 토요일마다 한센인을 대상으로 무료진료를 했고, 군복무와 원주 가톨릭병원에 근무할 때는 원주의 노인 요양시설인 사랑의 집과 충북 제천의 살레시오의 집에서 주말마다 자원봉사를 했다.
부부의원을 개원했을 때는 원주역 주변 학성동 윤락촌 안의 19호집에 진료소를 차리고 주 1회 윤락여성을 진료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그에게는 ‘공짜 봉사’가 없었다. 진료소에 오는 아가씨들에게서 진료비 명목으로 500원을 받았다. 지금 갈거리 사랑촌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 ‘십시일반’ 이용자에게 식사비 200원을 자율적으로 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는 이 돈을 진료비나 식사비로 부르지 않고 ‘자존심 값’이라고 말한다. 위축돼 있는 그네들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값인 것이다. 윤락촌 진료소는 아가씨들의 숫자가 줄어서 1년 조금 넘게 운영하다가 문을 닫았다.

“물질보다 마음이 우선이다”
앞서 언급한 갈거리사랑촌 부지는 부부의원을 개원한 이듬해인 1990년 구입했다. 비용 5천여만 원 가운데 모자란 부분은 은행에서 대출을 조금 받아 마련했다. 원래는 은퇴한 뒤 숙원사업인 노인시설을 세워 운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봉사를 다니면서 여러 시설들을 보니까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시설에서 생활하는 ‘식구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내 집처럼 편하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복지 시설은 식구들을 위한 요양시설이 되어야 하는데, 운영자를 위한 시설이 적지 않거든요. 그래서 더 서둘러 개원하게 됐습니다.”
사랑촌이 들어선 마을은 칡, 한자로는 갈(葛)이 많이 나던 고장이어서 ‘갈거리’로 불렸고, 이 말의 어감이 좋아서 시설의 명칭에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갈거리사랑촌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30여명의 노인과 젊은이・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자는 곳은 다르지만, 활동시간 중에는 남자와 여자들도 함께 어울린다.
“노인시설과 아동시설, 또 남자와 여자 시설이 구분돼 있는 것이 이해가 안 되더군요. 비록 장애가 있을지라도, 아니 어쩌면 장애가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들은 함께 지내야 해요. 서로 의지하며, 도움을 주다 보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거든요. 그래서 저는 식구처럼 함께 지내는 가족공동체를 꾸리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식구’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노인과 지적장애인 거주시설을 운영하다 보니까 밥이 남았다.
남는 음식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끼니를 거르는 독거노인과 장애인, 노숙인, 영세한 지역주민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1997년에 차린 것이 연중무휴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 ‘십시일반’이다.
십시일반을 운영하다 보니 노숙인 문제가 심각하다 싶어서 1998년 원주노숙인센터를 만들었다. 이곳은 정원 25명의 노숙인보호 및 이용 시설이다. 또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살 집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는 1999년 봉산동할머니의 집을 마련했다. 이 집은 공공요금과 난방비를 포함해 월 5만 원을 내면 이용할 수있다.
아울러 십시일반의 자율 식대 200원 등을 모아 1999년 갈거리장학회를 만들었고, 2004년에는 저소득층의 자활을 지원하기 위해 갈거리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물 흐르듯 사는 것이 가장 좋다(上善若水)’고 말했다. 곽 대표의 사회봉사는 시설을 먼저 만든 뒤 이용자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복지 수요자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찾아낸 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시설이나 제도를 만든 ‘맞춤형 복지’의 모범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복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물질보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이 먼저여야 할 것 같아요. 굶어 죽더라도 평등하게 대해주고, 마음으로 위로해주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거든요. 마음이 담긴 밥 한 끼에 행복이 있는 겁니다.”

아산상을 받는 소감은 어떨까.
“무척 큰 상이고, 상금도 2억 원이나 되는 아주 많은 액수여서 놀라웠어요. 큰일 났다, 이런 상을 받을 만큼 일을 했나, 이 많은 돈을 어디에 쓰나, 두려웠어요. 한편으로는 어릴 때부터 가진 봉사의 꿈을 인정받은 기분도 들어서 기쁘기도 했지요.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라는 지원과 격려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상금은 개인적인 용도로는 절대 안 씁니다. 갈거리사랑촌은 나름대로 잘 운영되고 있어서 여기에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공적인 곳에 사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쓴 김중미 작가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세상살이가 갑갑할지라도 약자들을 위한 삶을 사는 곽병은 원장 같은 분들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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