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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 만난 예술가 늘 푸르게 살아있는 큰 나무 김재영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 이해인의 시 ‘민들레의 영토’ 중에서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 자리한 유서 깊은 수녀원을 찾았다. 오늘 내가 만나기로 한 분은 성베네딕도수녀회 소속의 이해인 클라우디아(68) 수녀, 일명 ‘구름 수녀’이다. 더불어 <민들레의 영토>라는 첫 시집 이래 노란 가슴으로 낳은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꽃의 시인’이기도 하다.
수녀원 정문에 들어서니, 고요한 수녀원의 정갈하고 평온한 기운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했다. 푸른 잔디와 잎이 무성한 나무들, 그리고 색색의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자의 길을 가는 분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듯이 잘 가꾸어 놓은 정원은 방문객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시인이 ‘가을 편지’란 시에서,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 내야 한다고 했던 말이 실감났다.
정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니, 정겨운 글자체로 ‘해인글방’이 보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에는 책과 성물, 그림엽서, 예쁜 조가비 등이 아기자기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시도, 얼굴도, 몸도, 웃음까지도 동그란 이해인 수녀시인이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책상 위에는 연자줏빛 수국 한 송이가 화병에 꽂혀 있었다. 크고 둥글고 푸근했다.
“전에는 작은 꽃들에게 관심이 많았는데, 요즘은 큰 꽃들도 좋네요”라며 다정한 시선으로 수국을 바라보던 수녀시인은 갑자기 조개껍질 여러 개를 가져와 내 앞에 늘어놓았다. 하나를 고르라 했다. 물결무늬가 고운 조개껍질을 하나 고르니 뒷면에 흰 종이가 곱게 접혀 붙어 있었다. 그걸 펼치자 글귀가 적혀있었다.
‘너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이끌어 주리라.’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졌다. 감사와 기쁨으로 가슴이 출렁였다. ‘아, 사랑을 이렇게 전하는 수도 있구나.’ 대도시에서 늘 흔들리며 살아온 나를 단숨에 안정시키고 용기를 주는 위로의 언어였다.

진실의 언어, 축복의 언어
늘 느끼는 거지만, 기이하게도 해인 수녀님의 시는 놀라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잘 꾸민 언어, 세련된 기교 탓이 아니다. 오히려 맑은 영혼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진실의 힘 때문이다.
어젯밤에도 나는 시인의 고운 시어들, 구름과 바다와 꽃과 별을 즐겁게 따라 읽다가 어느 결에 울컥, 하고 말았다. 힘겹게 캐어낸 고독의 진주, 오랜 인내가 피워낸 눈물의 하얀 소금꽃, 저녁노을 위로 울려 퍼지는 용서의 푸른 종소리…. 모두가 삶의 고통과 분노를 승화시킨 영혼에서 자라고 태어난 진실의 언어, 축복의 언어인 탓이 아닐까.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시는 언제나 꿈을 꾸게 만드는 하나의 놀이이고 노래였어요. 전쟁의 폐허, 납북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들로 얼룩져 우울하고 힘들었던 초등학교 시절에 언니 오빠가 낭송하던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의 시들은 특별했어요. 저를 모국어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 주었지요. 중・고등학교의 문예반 시절에는 시를 읽고 모으고 나누는 일이 좋아, 문집 만드느라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어요. 수도생활을 먼저 시작한 맏언니의 영향으로 여학교를 졸업하고 수도원에 입회한 저에게 시는 하나의 기도로 다가왔습니다. 저 자신이 타고르의 ‘기탄잘리’에 나오는 갈대피리가 된 것 같은 희열도 느껴 보았지요.”
그 순간 수녀시인의 뺨이 홍조를 띈 건 젊은 날에 대한 아련한 향수 탓일까.
정지용의 ‘향수’나 칼 붓세의 ‘산 너머 저쪽’ 등을 좋아한 시인은 수도회 입회 이후, ‘민들레의 노래’라는 혼자만의 노트를 만들어 더러 시를 써두곤 하였다. 이것이 훗날 <민들레의 영토>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선보인 첫 시집이 되었다. 1976년 2월 종신서원을 하며 일종의 기념시집 형태로 발간 된 이 시집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어서 출간한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시간의 얼굴> 등도 매우 인기가 있었다.

유연하고 폭넓은 시선
특히 1980년대 네 권의 시집들이 모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면서 안팎으로 예기치 않은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일부 평론가들이 소녀 취향적인 감성의 시만으로 몰아갈 때는 엷은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작은 위로>, <작은 기도> 등의 수많은 시집과 <사랑할 땐 별이 되고>, <엄마>,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등의 산문집을 꾸준히 썼고, 마침내 독자의 사랑과 평단의 인정을 동시에 받았다. 최근에는 문학적 성과를 더욱 인정받아 “문예지 특집으로 싣자”, “전집을 발행하자”는 제안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 많은 책의 인세 수입은 어떻게 하세요?”
느닷없이 나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수녀시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야 수녀회 공식 계좌로 다 들어가지요. 우리는 공동체 생활을 하니까”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눈을 찡긋하며, “대신 가끔 출판사에서 주는 문화상품권은 내가 서명용 색연필이나 스티커 사는 데 쓴답니다”라고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게 비밀이라면 비밀인 셈이었다.
아하! 속으로 감탄사가 절로 났다. 개인으로 치자면 평생 넉넉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을 미련 없이 내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새삼 시인이 청빈한 수도자임을 실감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난해한 시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러자 “그런 시들도 꼭 필요한 시들이지요. 내 시는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시 세계도 고유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라며 폭넓은 시각을 드러냈다.
수녀시인은 사실 매우 유연하고 폭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로 정평이 나있다. 거기에는 기도의 힘뿐 아니라 학문의 도움도 있었으리라.
젊은 날, 수녀시인은 필리핀의 세인트루이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당시 졸업 논문으로 쓴 <에밀리 디킨슨과 김소월의 자연시 비교 연구>는 매우 창의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최고 점수를 받았다. 이후 1984년 서강대학교에서 <시경에 나타난 복(福)사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수녀시인의 정신세계를 더욱 폭넓게 해주었다.
그 때문인지 종종 다른 종교인들, 예를 들자면 법정 스님과 같은 분들과 교분을 쌓고 정신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되레 상처로 다가올 적도 있었다. 스님이 어느 글엔가 썼던 연심의 대상이 해인수녀가 아니겠느냐는 따위의 오해와 종교적 믿음이 부족하다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
시련이 닥칠 때면 늘 기도로써 인내하고 위로받으며 스스로를 일으켜 세웠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다를 수도 있음이 놀랍고 신기하네!’라는 식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갈수록 인내의 참 가치를 알고 실천하는 수녀시인의 언어에 더욱 공감했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속으로 하얀 피 흘렸지만/ 끝까지 잘 견뎌내어
한 송이 꽃이 되고/ 열매로 익은 나의 고통들
- ‘어떤 보물’ 중에서

수녀시인에게 ‘시’는 이웃에게 전하는 러브레터이다.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씨앗이다.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서선교를 할 수 있도록 원내에 ‘해인글방’을 마련해준 공동체의 배려 덕분에, 요즘은 마음 놓고 창작도 하고 번역도 한다. 그리고 편지를 보내오는 여러 독자들에게 틈틈이 답신을 보내는 일을 사명으로 여겨 오늘까지 계속 하고 있다.
자리를 옮겨, 우리는 독자와 신자들이 보내온 편지들을 모아둔 자료실로 갔다. 수녀시인은 사람들과 평생 정을 주고받은 흔적을 내보였다. 자료실 벽면을 가득 채운 그 편지들은 어떤 보석보다 더욱 값진 재산이리라.
‘수녀님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다’, ‘다시 기도하고 싶다’, ‘꼭 내가 쓴 것처럼 공감이 간다’라고 적힌 편지들을 읽다가 행여 자아도취에 빠질까 염려되어 종종 스스로에게 읽어 준다는 릴케의 글도 소개했다.
‘가슴속에 수백 년을 기다릴 참을성을 갖고 나의 짧은 시간을 영원한 듯이 살겠습니다. … 사물들이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인간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경험합니다. 이 모든 것을 조용히, 보다 큰 정직성을 갖고 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수련이 모자랍니다.’

수십 년 써온 143권의 일기
편지 말고도 또 다른 보물이 있었다. 수십 년 써온 일기가 그것이다. 고단한 수도회의 일상 속에서도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매일 손으로 적은 일기책이 무려 143권이었다. 오래되어 낡고 누렇게 변색된 공책들을 펼치니 자잘한 일상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시적 단상, 어머니가 보낸 말린 꽃잎, 누군가 보내온 기념우표, 연극 티켓까지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 갈피갈피에서 영롱한 시와 지혜의 언어들이 태어났으리라.
고향집에라도 들른 양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염치없게도 준비해 간 시집 여러 권을 내밀어 서명을 부탁했다. 한낮의 열기로 실내가 몹시 더웠다. 그런데도 아랑곳 않고 색연필과 스티커로 열심히 서명을 하는 수녀시인의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덕담과 더불어 꽃, 나비, 리본을 잔뜩 그려 넣어서 서명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다시 태어나면 알록달록 색을 쓰는 화가가 되고 싶기도 해요”라고 즐겁게 말하지만 시인의 이마는 이미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조심스레 대장암 병세를 여쭈었다.
“동료 수녀님들 말씀이 나처럼 잘 웃고 잘 먹고 씩씩한 환자는 처음이래요. 쉽지는 않지만 투병도 즐겁게 하려고 해요”라며 밝게 웃었다. 방문객을 만날 때면 ‘누군가의 일생을 만나는 것’이라 여긴다는 소신대로, 아프고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참으로 대단하게 여겨졌다.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촛불 한 개라도 더 켜는 것이 낫다’는 격언대로 습관적인 불평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작은 기쁨을 많이 만드는 ‘감사의 사람들’이 되라고 권한 수녀시인의 글이 문득 생각났다. 그것은 죽음 직전의 고통 속에서도 “내 몸이 속히 안정을 취해야 할 텐데” 정도로만 절제해 표현했다던 수녀시인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일까. 말한 대로 실천하려 애쓰는 삶. 그러한 일상의 실천과 오랜 성찰이 세상을 밝히는 시를 태어나게 하는가 보았다.

사랑의 먼 길을 가려면/ 작은 기쁨들과 친해져야 하네
고맙다고 말하면서/ 즐겁다고 말하면서
자꾸만 웃어야지
- ‘작은 기쁨’ 중에서

삶 자체로 시를 쓰는 시인
‘병도 때로는 축복이 된다’고 믿기 때문일까. 해인 수녀는 아픈 뒤로 강연 요청이 더 쇄도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콧등으로 자잘한 주름을 만들어 장난스런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스스로 이름 붙인 ‘명랑 투병’ 그 자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엔 ‘언덕방’으로 향했다. 수녀시인이 이름 붙인 그 방은 고인이 된 박완서 선생님이 생전에 가끔 들러 며칠씩 묵었던 곳이라고 했다. 수녀님과 각별한 정을 주고받았던 박 선생님은 내게도 여행을 함께 한 적이 있는 특별한 분이었기에 새삼 마음이 끌렸다.
언덕길을 오르며 최근에는 일상을 어찌 보내느냐 물었다. 그러자 정원의 수국을 가리키며, “나도 저 수국처럼 둥글고 수수하게 살려고 해요”라며 말을 아꼈다. 한참 침묵하다가 “나이 들수록 공동체와 동료들이 더욱 소중하고 정겨워요”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언덕방에 이르러 잠시 고즈넉한 분위기에 빠져있던 나는 그 풍경을 소중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저녁이 가까웠다. 우리는 함께 근처의 작은 음식점으로 가서 칼국수를 시켰다. 국수를 좋아해서 가끔 들르는 곳이라는데, 맛이 담백하고 깔끔했다. 마침 식당 주인의 아이가 병원에 입원한 걸 알게 된 수녀시인은 “제가 기도방문해도 될까요”라며 조심스레 청했다. 주인이 몹시 기뻐했다.
내가 이 칼럼의 독자 중에는 환자와 그 가족들도 있으니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읊어주었다. ‘정다운 삼월아 어서 들어오렴. 얼마나 숨이 차겠니? 나와 함께 이층으로 올라가자. 난 네게 할 이야기가 많단다.’ 그러면서 “어둠의 벼랑 끝에서도 노래로 일어서는 삼월의 바람처럼, 다시 일어서시길…” 하고 염원했다. 그것은 어쩌면 투병중인 자신을 위한 노래일지도 모르겠다.
‘신을 위한 나의 기도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 숨 쉬는 나의 매일이 읽을수록 맛 드는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때로는 아까운 말도 용기 있게 버려서 더욱 빛나는 한 편의 시처럼 살게 하소서’라고 노래한 이해인 수녀시인. 시인은 이미 종이 위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으로, 삶 자체로 시를 쓰고 있었다.
기차역을 향해 가던 내가 문득 뒤돌아보니 수녀시인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향기 나는 동그란 웃음을 지으며. “기도 속에서 만나요!”
작은 민들레의 영토를 노래하던 시인은 어느새 큰 나무가 되어서 있었다. 그 품으로 새와 곤충들을 기르고, 넓은 그늘로는 사람들을 쉬게 하는 나무 같은 존재. 우리 곁에서 늘 푸르게 살아있는 더 큰 나무가 되기를 바란다.

※김재영: 1966년 경기도 여주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문학박사). 2000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받으며 데뷔. 소설집 <코끼리>, <폭식> 출간. 외국인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그린 단편 ‘코끼리’가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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