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의학 이야기 심장에 처음으로 칼을 댄 의사 이재담

혼자 박동하는, 혈액으로 가득 찬 심장은 예로부터 생명을 상징하는 장기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에서 생명이 유래한다고 생각했고, 아즈텍 사람들은 노쇠한 태양이 생기를 잃을까 걱정하여 인간의 심장을 제물로 바쳤다. 수천 년 동안 사망의 기준은 심장이 멈추는 것이었으며, 사람의 심장을 수술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도 시도하지 못하던 심장수술에 처음 도전한 의사가 ‘개심술(開心術, open heart surgery)의 아버지’로 불리는 월튼 릴라이(Walton C. Lillehei)였다. 그는 젊어서 임파선 암이라는 절망적인 병에 걸리기도 했고, 미네소타 의과대학의 동료들로부터는 위험한 수술을 마구 시행하는 무모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듣기도 했지만, 심장병 환자들의 외과적 치료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꾸준한 연구와 동물실험을 바탕으로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심장수술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그의 최초의 업적은 1952년 9월, 동료 존 루이스와 함께 시도한 5세 된 여자아이의 심장에 난 구멍을 막아주는 수술이었다. 수술 중 체온을 낮게 유지하면 조직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동물실험으로 확인했던 그는, 이 수술에서 심장의 대사를 낮추는 저체온법을 쓰는 한편, 심장으로 들어오는 큰 혈관을 잠시 동안 겸자로 집어 심장 속을 비운 후, 심장을 칼로 열고 선천적으로 생겨 있던 구멍을 최대한 신속하게 꿰매는 방법을 썼다(이는 요즘 쓰이지 않는 매우 위험한 방법이지만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던 최선의 수법이었다).

심장수술 중에 심장을 대신하여 체외로 혈액을 순환시키는 장치가 개발되기 전이던 당시에 심장수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정시간 내에 수술을 끝내지 못하면 혈액공급이 차단된 조직, 특히 뇌세포가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수 분 이상 시간이 걸리는 심장 수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릴라이는 1954년에 아버지와 아기의 혈관을 서로 연결시켜, 아기의 심장을 수술하는 동안 아버지의 심장이 아기의 혈액을 대신 순환시키도록 하는 ‘교차순환법’을 도입하여 이 문제를 극복하였다. 그는 체외순환펌프가 개발될 때까지 이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40여 건의 심장수술을 시행하였다.

그 후 스승 릴라이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로우어, 슘웨이 등은 1959년까지 여러 새로운 장비와 수술방법들을 고안하여 심장외과 최후의 관문이라고 여겨지던 심장이식수술이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또 한 명의 제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크리스천 버나드는 미네소타에 유학한 후 본국에 돌아가 1967년 최초로 심장이식수술에 성공하였다.

남의 심장까지 옮겨 받을 수 있게 된 현대 심장외과의 눈부신 성취의 출발점이 개심술이라는 무모해 보이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여 생명의 근원인 심장에 칼을 대는 것을 금기시해온 인류의 오랜 고정관념을 깨트려준 월튼 릴라이 의사였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