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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담인 “아산장학금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채승웅

이번 호 ‘우리는 정담인’에서는 서울아산병원 동관 약제팀에서 동관조제 UM(Unit Manager)을 맡고 있는 나양숙(44) 약사를 소개한다. 그녀는 서울아산병원에서 21년째 근무하고 있으며, 2009년에는 한국병원약사회에서 주최한 병원약사대회에서 병원약제업무 개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병원약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학금 덕분에 자기계발
나양숙 씨는 1969년 경기도 화성에서 1남6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농사를 지어 어려서부터 가정환경이 넉넉지않았다. 덕성여대 제약학과에 합격했지만 입학금, 등록금이 문제였다.
“직장생활을 하던 형제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입학할 때 큰 오빠가 수년간 키우던 소를 팔아 입학금을 마련했죠. 대학교를 다닐 때도 언니, 오빠들이 생활비를 지원해줬습니다.”
하지만 매번 형제들에게 손을 벌릴 수 없어서 그녀는 입학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과외와 제약회사 설문조사 등 학업과 병행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많지 않았다. 그녀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한 교수님이 아산장학생으로 그녀를 추천했고, 그녀는 2학년부터 4학년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았다.
“요즘도 제가 아산장학금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을 많이 해요. 정말 운이 좋았고, 감사한 일이죠.”
등록금이 해결되자 그녀는 아르바이트 대신 자기계발에 집중했다. 약초를 연구하는 동아리 ‘생약반’에 들어가 활동하는가 하면, 학업에 전념해 성적도 우수했다.
대인관계가 좋았던 그녀는 3학년이 되던 1990년, 정담회 재학생 회장을 맡아 농촌봉사활동과 졸업생 환송회, 신입생 환영회 등 정담회와 관련한 크고 작은 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정담회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90년에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를 직접 만난 일이다. 당시 그녀는 조남두(정담회 2기, 현 신구대학 유아교육과 교수) 선배와 함께 정담회 사무실 이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계동 사옥을 방문했다.
“설립자를 어려운 분으로만 생각했는데,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저희를 배려해주시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저 또한 그분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편안해졌죠.”
회장을 맡고 있던 당시에는 번거로운 일들이 많았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정담회원들에게 연락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연락할 일이 있으면 회원들의 집으로 전화를 하는데, 집에 있는 회원들이 거의 없었죠. 또 우편물을 한번 보내려고 해도 며칠 동안 작업을 해야 했어요. 회원들이 전달 내용을 잘 받았는지 회신을 받는 것도 불가능했죠.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다면 1분이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인데 말이죠(웃음).”
광화문에 있던 정담회 사무실은 1991년에 서울아산병원이 위치한 풍납동으로 이전한다. 당시 풍납동은 교통이 상당히 불편한 곳이었다. 마침 졸업반이어서 병원 실습을 앞두고 그녀는 어떻게든 서울아산병원에서 실습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병원에 전화해 제약팀 실습생으로 받아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아직까지 실습생이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당시는 서울아산병원이 개원한 지 2년이 채 안 된 시기였어요. 제발 받아달라고 사정한 뒤에 2주 동안 실습할 수 있었죠. 그렇게 서울아산병원 약국 최초의 실습생이 됐습니다(웃음). 그리고 다음해 서울아산병원에 입사했죠.”
그녀는 21년 동안 서울아산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신관에서 동관 입원약국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녀의 업무는 인력관리, 업무 계획, 업무 개선, 타부서와의 업무 조율 등 동관 입원약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리하는 것이다. 현재 동관 입원약국에는 50여 명의 약사가 일하고 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곳
아산장학금은 그녀에게 단순한 장학금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고마운 연결고리였다.
“제가 회장이던 때에는 정담회 사무실이 광화문 인근에 있었어요. 정담회 회원들은 특별한 행사가 없어도 일주일에 한 번 그곳에 모여 친분을 쌓았죠. 사무실 근처에 있던 미리내분식, 명다방 등의 상호가 아직도 기억나네요. 요즘도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 목록을 보면 대부분이 정담회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사람들이에요. 아산장학금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고마운 장학금이었습니다(웃음).”
그녀는 요즘도 젊은 시절을 함께한 동문들을 가끔 만난다고 한다.
“다들 마흔을 훌쩍 넘겼는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언니’, ‘오빠’, ‘야’라는 말이 나와요.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죠. 저에게 있어 정담회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나양숙 씨는 아산장학금을 받았던 일을 자주 떠올린다. ‘그때, 아산장학금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적어도 받은 만큼은 다른 사람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고 느낀다. 꼭 금전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앞으로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녀는 의료봉사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그녀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또 훗날,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누군가는 다른 어려운 사람을 위해 선행을 베풀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작이 ‘아산 정신’이었음을 누군가는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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