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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그대가 되어 아산 효행가족상을 받은 양선화 씨 이인영

해가 일찍 떨어지는 전북 장수군 산내면 산골마을. 딸 부잣집 둘째 딸 효녀 양선화 씨(31)의 고향이다. 부모님은 어둑어둑 할 때까지 농사를 지으셨다. 서마지기 논농사와 양봉으로 열명이나 되는 식구들을 건사해야 했다. 집에 와선 조롱조롱 달린 여덟이나 되는 귀여운 딸들을 돌보았다. 밤에 걸레를 빨다 쓰러지신 어머니. 그로부터 3년 후인 1994년 태중의 막내가 8개월일 때 다시 한번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반 식물상태가 되어 버렸다. 양선화 씨는 그때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앳된 산골 아가씨였다. 바로 위의 언니처럼 도시로 나가 취업하여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세상과 맞닥뜨리고 싶었던 선화 씨. 그 날은 그에게 특별한 날이 되고 말았다.

두 달 후 막내 애수도가 태어나 딸 아홉이 되었으며, 병원 생활은 1년이나 지속됐다. 어머니 곁엔 선화 씨가 붙어 있었다. 할머니가 오셔서 아버지의 농사를 거들었고, 언니는 돈을 부쳐왔다. 집안일을 하고 어머니를 간병하고 동생을 챙기는 일은 몹시도 힘에 부쳤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이게 아무래도 하나님이 주시는 내 일인가 봐. 젖을 얻어 먹이거나 우유를 먹여야 하는 막내, 그리고 초,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7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땐 그래도 아버지가 계셔서 든든함이 있었다. 아버지마저 3년 뒤 뇌출혈로 쓰러지시더니 시름시름 앓다가 그 2년 후인 1999년 세상을 뜨시고 만 것이다. 23세가 된 그는 두려움과 암담함, 서러움에 눈물만 비 오듯 쏟을 뿐이었다.

“이렇게 힘드셨구나!” 심성 좋은 그는 여자 몸으로 농사를 지으면서도 너무 힘들 때면 아버지를 떠올렸다. 생계문제의 절박함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가족을 선택한 선화 씨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고추를 심어놓고 유월에 돌아가신 아버지. 고추를 따서 말리는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몸도 약하신 아버지가 하고 싶은 교회 일도 못하시고 누워있는 아내와 딸들을 생각하며 하루 종일 일에 매달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파왔다. 선화 씨는 갖가지 노동을 인내하고 밤낮으로 일했다. 양봉할 땐 벌에 쏘이면서도 온유했던 아버지와 괄괄했던 어머니, 동생들을 생각하며 참았다. 이웃해 살던 작은 엄마가 돕고, 마을 어른들, 교회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논개의 기상이 서린 장수군에서 난 때문인가. 선화 씨의 얌전하면서도 꿋꿋한 정신력은 리더로서도 가장으로서도 손색이 없어서 점점 마을 어른들의 자랑거리가 돼가고 있었다. 공사판 일도 식당 주방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생들은 선화 씨의 사랑과 정성을 아는지 잘 자라 주었다. 바로 밑의 셋째는 대학 영문학과를 나와서 학원 강사를 하고, 넷째는 전문대학 정보통신과를 나와 큰 언니 회사에 사무직으로 취업해 같이 다닌다. 다섯째는 전주예수병원 간호사며, 여섯째는 치위생학과 3학년, 일곱째는 유아교육과 2학년이다. 취업한 동생들은 언니들이 한 것처럼 하나같이 헌신적으로 동생들 학비를 모으고 동생들도 장학금을 타려고 노력한다. 선화 씨는 그렇게 보낸 14년의 세월을 통해 자신이 동생들에게 해온 일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말이 적은 조용한 아가씨다. 정 많은 마을 사람들이 챙겨주고 교회 분들이 재정적인 도움을 주며 아껴준 일, 언니 회사의 윗분이 한 5년간 매달 10만 원씩을 보내준 일들을 마음속에 곱게 간직하고 있다. 그 가운데 소리 없는 선행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가정을 방문해 경험담을 들려주고, 들일을 돕는다.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에 항상 앞장 서는 그. 교회와 부녀회 활동, 경로 행사 등에도 적극적으로 임해 마을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주위 분들의 추천으로 산서초등학교 교무 보조로 취업해 다니고 있다. 취업 후엔 면내 13명의 결손 가정 자녀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학용품 지급, 방과 후 생활지도를 하며 초등학생들의 큰 언니가 돼주고 있다고 한다.

노부부가 80% 이상인 능곡마을. 노인들은 보았다. 남의 여식이지만 한결같이 어머니를 보살피고 어른 공경할 줄 아는 그가 여간 신통한 게 아니었다. 노인회 회원들과 각 단체는 앞 다투어 그에게 전국단위 효행상을 주길 희망했다. 상 받기를 사양하고 싶고, 효녀로 알려지기도 부끄러웠던 그의 마음은 열화 같은 성화에 휩싸이고 말았다.

마른 가지들이 기지개를 켤 것 같은 하오. 부엌 창 밖으로 뒷산 영대산이 보이고 큰살림인 장독들이 한쪽에 놓여 있다. 창턱엔 깻잎 단지가, 가스레인지 위 큰 냄비엔 무국이 남아 있고 들깨 자루가 마루 한쪽에 쌓여 있다. 지금은 직장에 다니랴 공부하랴 동생들이 다 떠나고 며칠 후 고 3이 되는 여덟째, 고 2가 되는 막내와 어머니, 이렇게 넷이서 단출히 살아가고 있지만 집에는 음식과 개켜진 빨래들이 삶의 향기를 느끼게 해준다. 이 날은 특별히 방학이라 집에 온 일곱째 한나가 합류해  모처럼 네 자매가 되었다.

“언니 도시락이 제일 맛있어요. 일찍 일어나 도시락 싸줄 때 고마워요.” 학원도 못 다니고 입시를 준비하는 여덟 째 사라가 쑥스러운 듯 언니 칭찬을 해준다. 막내 애수도도 질세라 “전 제빵을 배우고 싶어요.”하며 웃는다. 애수도는 엄마가 쓰러지고 나서도 세상 빛을 본 소중한 동생이다. 힘들게 키운 애수도가 멋을 내고 꿈을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선화 씨가 미소 짓는다.

까르르~. 한 마디 건넬 때 마다 네 자매가 수도 없이 만드는 웃음바다. 가난이 이들에게 선사한 맑은 웃음소리가 퍼진다. 단지 “언니를 빨리 시집보내야 줄줄이 밀리지 않는다.”고 얘기했을 뿐인데 그들은 모든 것이 유쾌하다. 넷도 이럴진대 아홉 자매가 모이면 어찌될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마루에서 보니 열어놓은 안방 침대의 어머니도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14년간 고개만 간신히 돌리며 말도 못하고 살아오신 어머니.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져 감정 표시가 되는 어머니가 곁에 계셔 준 것이다. 이야기보따리를 어머니 곁에서 풀기로 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양명한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행복하게 완성된 웃음꽃이 만발한다.

“효도가 뭐죠?” 그가 수줍게 답한다. “엄마를 많이 웃게 하는 게 효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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