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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편지 배려가 필요한 계절 백가흠

일상을 가져가면서 시간을 느낀다는 것은 어려운 일 같습니다. 세월이나 시간은 언제나 문득 찾아오곤 하지요. 반복되는 생활, 하루하루가 같은 일상에서 우리는 성큼 바뀌어 있는 계절에 당황하곤 합니다. 마음 한구석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네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갔구나, 철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계절이 지나간 것을 알지 못한 자신을 깨닫자 후회가 밀려옵니다.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릅니다.

계절을 느끼기 힘든 때입니다. 시간이나 세월을 알아채기 쉽지 않습니다. 여름이 간 줄 모르고 가을을 맞이하고,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서도 우리는 겨울로 가는 여정을 느끼지 못하곤 하지요. 봄과 가을의 색깔은 점점 옅어지고, 여름과 겨울은 그 정취가 이르게 찾아와 우리를 난처하게 합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아, 가을인가, 하자마자 서둘러 겨울옷을 꺼내 입어야만 했지요. 길을 걷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빛이 노랑 은행잎으로 물들어 있네요. 가을은 가을인가 느끼면 지나가버린 후가 대부분이지요. 겨울의 문턱을 넘고서야 시간을, 세월을 느낍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허전함이 밀려듭니다. 작년겨울에서 올겨울까지의 시간이 빠르게 머릿속에 흘러갑니다. 잊고 있었던, 챙기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달라진 찬 공기와 함께 가슴속으로 밀려들어 옵니다. 무엇이 이렇게 계절을 계절로 느끼지 못하게 만든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들만 놓치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저는 어디에 지금 서 있는 걸까요.

지난겨울 저는 그리스에 있었습니다. 두 달이나 아테네에 있었지요. 그곳은 알다시피 큰 국가적 난국에 모든 국민이 처해 있습니다. 고즈넉한 고대도시의 유적들은 모든 것을 다 예견했다는 듯이 여전했습니다. 4천년의 유구한 도시 역사가 증명하듯 쉽지 않았을 난관과 시대를 견딘 유적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도시는 들끓었지만,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은 찬란하게 말없이 부서져 내렸습니다.

국가부도 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곳 국민들은 침착했습니다. 모두가 쉽지 않은 환경에 처했지만, 크게 동요하는 법도 없었고요. 헌데 시민들이 갑자기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차 금융구제로 인해 그리스 정부의 거의 모든 기간산업이 외국자본에 의해 팔린 경우에도 국민들은 정부 정책을 믿고 따랐는데, 사람들이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이 가장 큰 돈을 그리스 구제비용으로 지불하고 있는데, 그것에는 큰 대가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1차 구제금융 당시 공항, 항만, 철도, 도로, 그리고 정부청사 건물 같은 기간산업이 거의 독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독일이 또다른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는데, 교육과 의료산업에 대한 개방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국민들의 분노는 대단했습니다. 1998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우리와 같은 고민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그리스 국민들이 화가 단단히 난 이유는 교육과 의료는 복지나 산업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었지요. 교육과 의료는 그들에게는 기본권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혜택이 돌아가는 고유한 권리였는데, 그것을 산업화 할 움직임이 보이자 국민들 대부분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저는 그곳에서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때마침 한국을 떠나오기 전, 한참 복지와 포퓰리즘 논쟁이 활발했던 터라, 그 인상은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기본권을 평등하게 누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지라는 이름으로 선택적으로 행해지는 것들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기본권리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IMF사태 이후, 거대한 외국자본에 의해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10년여가 지난 지금의 우리는 어떤 것을 극복했는가 하는 것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그리스 국민들이 저렇게 큰 분노로 저항하는 것은 10년여가 지난 후 자신들의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먼 미래의 자신들의 모습이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닐 것이라는 걸….

가장 혹독한 겨울이 몰려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혹한이 세상을 잠식하면 추위에 가장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에서고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따뜻한 집에 있으면 밖이 추운 줄 모르고, 밖에서 자는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지 못하겠지요. 겨울은 주위의 배려가 필요한 계절입니다. 사람의 가슴이 얼기 쉬운 계절입니다. 마음과 감정까지 꽁꽁 얼어버리지 않도록 이웃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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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가흠: 1974년 전북 익산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나프탈렌>, <조대리의 트렁크>, <힌트는 도련님>, <귀뚜라미가 온다>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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