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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풍경 “한국에 시집온 2번째 캄보디아 여인” 조성진

경기도 안산시 화랑초등학교 2학년인 이문선(8) 군은 엄마가 캄보디아 여인이다.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피부가 까무잡잡하다. 또래들로부터 따돌림 받을 법도 하건만 중학생 버금가는 덩치와 뛰어난 축구 실력으로 오히려 인기가 드높다.
하루는 문선 군의 친구가 자전거를 도둑맞았다면서 “잡기만 하면 혼내 주겠다”고 화가 나서 말했다. 그러자 문선 군이 “우리 엄마에게 말해줄까? 우리 엄마 경찰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문선군의 기세에 눌려 그 자리에서 반박하지는 못했지만 집에 돌아온 친구는 자신의 엄마에게 “문선이가 거짓말한다”고 일렀다.
엄마들끼리도 왕래가 있어서 그 친구의 엄마는 문선이 엄마가 캄보디아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임을 알고 있었다. 적극적이고 솔직하다는 인상을 받은 문선이 엄마가 거짓말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주 여성이 대한민국 경찰관이라는 사실도 믿기지 않아서 한참을 망설인 끝에 직접 확인 전화를 했다.
“저기 있잖아요…, 문선이가 우리 애에게 말했다던데, 문선이 엄마 혹시 경찰이에요?”
“네, 맞아요. 저, 안산경찰서 소속 경찰관이에요.”
외국인 특유의 억양으로 또박또박 말하던 문선이 엄마, 라포마라(30) 경장의 대답은 그날 이후 화랑초등학교 학부모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군인 아버지 영향 받아 MIU 선망
라포마라 경장은 1982년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에서 태어났다. 3남3녀의 둘째이자 장녀였다. 아버지(롱사론・8)는 군인으로 국방부에서 근무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령에 해당하는 계급이다. 어머니(라사란・8)는 주부인데, 부모 중 어느 쪽의 성(姓)을 따라도 상관없는 캄보디아의 관습을 따라 그녀는 어머니의 성을 쓴다.
“아버지가 대령이면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않느냐?”고 묻자 “보통으로 살아요”라고 대답하며 보기 좋은 미소를 짓는다. 캄보디아의 경제 수준이 우리나라와 차이가 많이 나서 월급을 많이 받지 못한다는 보충설명이 이어졌다. 그래도 중산층에는 해당한다고 한다.
캄보디아는 오랫동안 내전을 겪었다. 그녀가 성장할 때는 하나같이 먹고살기가 어려울 때여서 여자들은 대부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남다른 아버지의 교육열 덕택에 그녀는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사실 그녀의 꿈은 군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부대에 자주 놀러 갔고, 부대에서 여군들을 많이 만난 영향이 컸다. 여기에 삼촌도 우리나라 경사에 해당하는 경찰관이어서 MIU(Men In Uniform, 제복 입은 공무원)에 대한 선망이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주부로 살라는 어머니의 반대가 강력해 일반 고등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그녀는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아서 관광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또 캄보디아에 사업을 하러 온 한국인들에게 캄보디아 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한 한국을 당시 캄보디아인들은 상당히 좋아했다.

얼굴 한번 안 보고 결혼 결심
2003년 2월, 캄보디아를 찾은 한국인 단체 관광객 중 한 명이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다. 사회성 좋고, 얼굴만큼 마음도 예쁘며, 날씬하기까지 한 그녀를 보면서 그는 처남(이길수・5)을 떠올렸다. 광주광역시 구동의 한 건물 2층에서 그는 도자기가게를 운영했고 처남은 1층에서 신발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처남은 36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한 노총각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동의를 구해 사진과 연락처를 받아 귀국한 그는 처남에게 메모를 전했고, 이날부터 광주와 프놈펜에서 뜨거운 이메일과 전화통화가 오갔다.
그리고 3개월 만인 그해 5월, 두 사람은 결혼을 결심했다.
남자야 노총각이니 문제될 일이 별로 없었지만, 여자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그것도 외국인인 남자와 어떻게 결혼하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몇 날 며칠을 울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외국에 나가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보겠다는 그녀의 결심과 의지를 말릴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사진을 보니까 지금의 남편이 잘 생겼고, 착하게 보이더라고요. 이 판단을 믿기로 했어요. 사실 저는 겁이 없어요. 내가 잘 하면 상대방도 잘 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죠. 결혼한 지 10년이 다돼 가는데, 2남3녀의 막내인 우리 남편은 정말 착하고 성격이 밝아요. 그래서 저는 이 결혼을 후회하지 않아요.”
프놈펜공항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2003년 5월 10일, 마침내 캄보디아 현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대사관에 혼인신고를 하러 갔더니 제가 한국남자와 결혼한 두 번째 캄보디아 여인이라고 하더라고요”라면서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한국살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광주광역시에 살림을 차린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결혼 4개월 만이었다. 남편이 척추결핵으로 쓰러져 3개월간 입원을 하는 등 1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한 것이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에서도 극진히 간호하여 남편이 건강을 되찾도록 하였다. 당시 일을 떠올리던 남편은 “최소한 하반신 마비가 될 뻔 했는데 문선 엄마 덕에 살았다”면서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20대 1 경쟁률 뚫고 경찰시험 합격
남편은 열다섯 살이나 어린 신부를 지극정성으로 위해 주었지만, 그녀는 집에만 있기에는 성격이 너무 활달했다. 다문화센터에서 한글과 한국 문화를 배우는 한편 통역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2008년,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보건복지부에서 주최한 결혼이주여성 수기 공모에 응모해 최우수상을 받았고, 이듬해 3월 1일에는 보신각에서 열린 타종식에 이주여성 최초로 초청돼 타종하는 영광을 누렸다.
2009년에는 여성가족부 산하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했다. 캄보디아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을 상대로 한 멘토 역할이었다. 상담을 해보니 사소한 문제로 이혼까지 가는 경우가 참 많았다. 며느리가 친정에 건 전화요금이 너무 많이 나와서 시어머니와 싸우다가 이혼하기도 했고, 향이 지나치게 강한 캄보디아 음식 때문에 갈라서기도 했다. 경찰관이 된 지금에 와서 보면 이때의 상담 경험이 큰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혼이주여성들의 갈등을 조정하고 풀어줄 수 있는 일을 고민하던 그녀는 경찰에서 매년 외사요원을 특별채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통번역시험 등의 시험정보를 모은 그녀는 도서관에서 수험준비에 매달린 끝에 2010년 8월, 시험에 합격했다.
15명을 선발하는데 300명이 몰려 20대 1의 경쟁률을 보인 시험이었고, 외국인이라고 해서 특혜를 주는 일 없이 한국인들과 똑같이 필기시험과 적성・신체검사 그리고 면접을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15명의 특채 경찰관 중 3명이 외국인이었다. 그녀 말고 두 사람은 인도네시아 출신 남자와 필리핀 출신의 여자였다.
시험 합격 뒤 경찰학교에서 교육을 수료한 그녀는 2011년 6월 27일 경기경찰청 소속으로 발령받았고, 남편・아들과 함께 지금의 안산으로 이사했다.
현재 그녀는 안산시 원곡다문화파출소 순찰팀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다. 1년이 조금 지난 경찰관 생활 중 실종신고가 들어온 노인 두 명과 30대 정신지체자를 찾아서 가족에게 인계한 일,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인연이 되어 지난해 다문화가정 부문 아산상을 받은 일을 가장 보람 있는 일로 기억하고 있다.
“앞으로는 외국인 전문 경찰관이 되고 싶어요. 외국인들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저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경찰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나라 결혼이주여성사(史)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 그녀가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을 이루어낼지 자못 기대가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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