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아름다운 동행 “음악 가르치고 아이들 사랑 얻어갑니다” 유인종

경기도 안양에 자리한 아동양육시설 안양의 집(원장 사지숙)에는 `요벨관악단´이라는 특별한 동아리가 있다. `기쁨을 전해주는 나팔소리´라는 의미를 지닌 `요벨´을 이름으로 정한 관악단은 10년 전인 2002년 5월, 7명의 아이들로 시작했다. 아이들은 당연히 악보를 읽을 줄 몰랐고 트럼펫이나, 호른, 튜바, 유포니움 같은 관악기를 접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4년 후 기적이 일어났다. 음악 콩쿠르 트럼펫 부문에서 중등부 1등과 초등부 1등이 나온 이래로 여러 콩쿠르에서 트럼펫 부문에 3명, 호른 부문에서 1명 등 연거푸 수상자를 배출했다.

상처받은 마음, 음악으로 자존감 회복
요벨관악단 아이들이 콩쿠르에 참가하면 심사위원들이 두 번놀란다. 첫 번째는 아이들의 연주 실력에 놀라고, 두 번째는 아이들이 일반 가정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는 것이다. 시설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음악 교육을, 그것도 피아노처럼 시설에 한 대쯤 있을 법한 악기가 아니라 관악기를 배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아는 까닭이다.
빼어난 솜씨로 심사위원들을 감탄하게 만든 아이들도 음악을 접한 뒤 두 가지 큰 변화를 겪었다. 첫 째는 슬픔을 이겨내는 법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은 하나같이 가슴에 칼날 같은 상처를 안고 지낸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벨 수도 있는 그 상처를 아이들은 악기를 불면서 발산하고, 다스린다. 그래서 아이들의 연주는 아무리 발랄한 곡을 연주해도 어쩔 수 없이 애련하다.
두 번째는 자존감 회복이다. 기가 죽었던 아이들은 무대에 올라 상을 받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표정이 밝아지고 자신감을 찾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독거노인이나 빈곤 아동, 장애인, 다문화가정 등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각종 연주회에 출연하면서 음악을 통해다른 이들을 돕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기적을 만들어낸 건 분명 아이들이지만, 아이들의 재능을 발견해 그 재능이 꽃필 수 있게끔 밑돌을 놓은 이가 있다. 바로 장기범(59) 서울교대 음악교육과 교수다. 장 교수는 요벨관악단이 만들어질 때부터 아이들과 함께한 ‘사랑의 전령’이다.

6개월 만에 아이들과 눈을 맞추다
동료 음악인들과 함께 문화소외계층을 찾아다니는 ‘음악 나눔’활동을 꾸준히 펼쳐온 장 교수가 아이들을 처음 만난 건 2001년 성탄절이었다. 한 교회의 찬양대를 지휘하던 장 교수는 찬양대원들이 안양의 집으로 자원봉사를 갈 때 동행해서 전공인 트럼펫 연주를 했다(안양의 집 아이들 중에 트럼피터가 많은 건 ‘사부’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한 듀엣 연주였다.
연주가 끝나자 사지숙(80) 원장이 장 교수에게 예전에 운영했던 안양의 집 악대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이들의 정서 함양을 위해 다시 악대를 만들고 싶다는 의향을 표시했다. 사 원장의 부친이 설립한 안양의 집은 관악산 자락, 널찍하고 풍광 좋은 부지에 자리 잡고 있다.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큰 재산인 사유지에 복지시설을 지어 운영하고, 아이들을 친손자처럼 대하는 모습에 감명 받은 장 교수는 사 원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2002년 봄부터 아이들 지도를 시작했다. 악기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내놓았다.
음악을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장 교수는 우선 악기를 불어 소리 내는 방법부터 가르쳤다. 그러곤 악보 보는 법을 차근차근 익히게 했다. 내성적인 아이들이 장 교수와 눈을 맞추는 데에는 6개월이 걸렸다.
이러는 사이에 7명으로 시작한 관악단원은 점점 지원자가 늘어 지금은 초등학생 1명, 중학생 7명, 고등학생 2명, 대학생 3명 등 모두 13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 중 튜바는 1명, 유포니움과 호른은 각각 2명과 3명이 다루고 있고, 트럼펫을 가장 많은 7명이 연주하고 있다. 대학생 중에서는 오순아 학생만이 음악을 전공하고 있고, 나머지 2명은 사회복지학과와 영문과에 재학 중이다.
장 교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마다 안양의 집을 찾아 지도하고 있다. 서울 반포동의 집을 나서 안양의 집에 도착하면 보통 오후 1시 무렵이 된다. 본격적인 연주에 앞서 아이들에게 워밍업을 시킨 뒤 합주를 하고, 몸의 유연성 향상을 위해 무용을 같이 한 뒤 다시 합주 연습을 한 데 이어서 개인레슨을 하면 금세 오후 6시가 된다.

11년째 아이들에게 음악지도
이 일을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하고 있다. 안식년을 맞아 외국에 체류할 때는 인터넷 레슨을 하기도 했고, 콩쿠르를 앞둔 아이들에게 불가피한 사정으로 개인레슨을 하지 못할 때는 춘천교대 박기범 교수에게 지도를 부탁했다. 오순아 학생이 음대 입학을 목표로 했을 때는 주중에 서울교대로 불러 집중 지도를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장 교수 업무가 한가한 것은 아니다. 학부와 대학원 강의만으로도 충분히 바쁜데, 서울교대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세종문화회관 이사, 한국음악교육공학회 회장까지 맡고 있다. 2005년부터 2년 동안은 과천필하모니오케스트라와 함께 ‘해설이 있는 음악여행’을 진행하기도 했다.
물론 안양의 집으로부터 받는 보수는 없다. 레슨비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월급에서 매달 30여만 원을 안양의 집으로 자동이체하고 있다. 악기에 치는 기름 같은 유지비와 아이들 간식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이다. “놀지 않고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 귀엽고 대견스러워서”라는 것이 장 교수의 설명이다. 장 교수는 지난해에 아산상 재능나눔상을 수상하며 부상으로 1천만 원을 받았는데, 이 상금마저 안양의 집과 안양노인전문요양원에 내놓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장 교수는 딱 한 가지 다짐을 받는다. “나중에 너희들이 잘 됐을 때 몸과 마음을 다친 사람들에게 잘 해줘야 한다”는 약속이다. 장 교수는 이 언약 이행을 아이들로부터 받는 보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느덧 물질이 주인이 된 세상에서 사는 일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세상은, 삶은, 아직 살 만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위로받기보다는 먼저 위로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줌으로써 오히려 받는 장기범 교수 같은 사람들.
행복해지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라고 했던가.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면서 사랑을 전하는 장 교수 같은 이들이 있어서 세상은 여전히 버틸 만한 것이다.

레슨 받지 않고 서울대 음대 입학
장 교수는 1953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는 경기도 평택에서 다녔는데, 안중읍의 안일고등학교 2학년일 때 경기도 콩쿠르에 나가 트럼펫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 일로 인해 서울 성남고등학교 음악 장학생으로 스카우트됐다. 하지만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군사관학교에 가라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할 수 없이 집에 못 가고 도서관을 거처로 삼는 생활이 시작됐다. 이때는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집안 형편도 넉넉지 않았지만, 부모가 반대하는 탓에 음악 레슨을 받을 수도 없었다. 심화된 트럼펫 연주법은 성남고 선배(장세근)를 통해서나마 겨우 익힐 수 있었다. 1974년 재수를 한 뒤 서울대 음대에 들어가자 ‘레슨을 받지 않고 서울대에 들어온 첫 번째 학생’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대학 졸업 뒤에는 서울 금란여고에서 2년 반 동안 음악교사로 근무했다. 학생들을 연습시켜 이화여대 강당에서 ‘사운드 오브뮤직’을 공연한 것이 교사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공부를 더 하기로 결심하고 교사를 그만둔 뒤 미국으로 유학, 동미시간주립대학에서 연주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미시간대학에서 음악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마친 뒤에는 청주교대와 이화여대, 교육개발원을 거쳐 1998년부터 서울교대 음악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두 살 아래인 부인(황성열・7)은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했는데, 함께 교생실습을 나가서 만난 뒤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다. 슬하에 딸이 세 명 있다. 큰딸만 결혼했는데 변호사이고, 둘째는 수의사, 막내는 의대에 다니고 있다. 세 딸 모두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레슨을 마치면 아이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줘요.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가진 재능을 조금 나눠준 대신 저는 아이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얻어가는 거죠.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단순한 제 제자가 아니라 세상을 같이 살아가는 동지들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웃음이 좋고, 눈빛이 깊은 장기범 교수. “아이들이 “노인네, 우리에게 이제 그만 오세요” 할 때까지 계속 안양의 집을 찾아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그의 소박한 소망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