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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나 “소외지역 자활 위해 재단 만드셨다” 김순용

나는 아산재단이 설립된 1977년부터 설립자께서 서거하신 2001년까지 24년 동안 의료자문위원을 역임했다. 어떤 면에서는 재단 의료사업의 발전상을 지켜본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경희대병원 원장과 한양대 의료원장을 지냈으면서도 재단과 아산병원에 대한 애정이 유독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간이 좀 지난 일이지만, 지난해 3월 1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설립자 10주기 추모음악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음악을 듣다 보니 설립자와 함께 보낸 추억들이 많이 떠올랐다. 나는 설립자가 인간적으로 그저 좋았다. 그 분은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였으면서도 그렇게 소탈하고 검소하실 수가 없었다. 정말 좋은 분이셨다.

전문가 의견 존중한 설립자
설립자를 처음 만난 건 1977년 의료자문위원을 맡으면서였다. 의료자문위원에 위촉된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내가 당시 경희대병원 원장이었고, 의학계에서 원로 대접을 받고 있어서 그러지 않았나 짐작했다.
그때는 이문호 서울아산병원 초대 원장이 의료자문위원장을 맡았고, 권이혁 서울대 보건대학원장, 김주환 서울대 치과대학 학장, 이성우 보건개발원 연구위원, 조규상 가톨릭의대 학장, 주근원 서울대병원 진료부장, 진동식 세브란스병원 원장 등 쟁쟁한 의학계 인사들이 자문위원진을 구성했다. 
24년이나 의료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을 꼽으라면, 당연히 서울아산병원이라는 세계적인 수준의 병원을 세우는데 일조한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1989년 6월에 개원한 서울아산병원은 설계에만 3년이 걸렸다. 의사들과 실무진들이 구미 각국의 최신 설비를 갖춘 병원들을 돌아보면서 참고하고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병원들도 찾아다니면서 시설과 운영, 특히 컴퓨터화 된 기기들을 살핀 뒤에 병원을 지었다. 자연히 세계 어느 병원에도 뒤지지 않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금의 서관만 지었다. 설립자는 18층 건물을 원했는데, 당시 세계보건기구(WHO)의 권고안이 13층이라는 우리 자문위원들의 건의를 설립자가 받아들이셨다. 설립자에 대해서 독선적이라는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설립자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존중해 주신다. 그런데 고집이 세긴 하시다. 다음에 동관을 건립할 때는 끝내 18층으로 지으신 것이다.
의료자문회의가 열려도 설립자께서는 참석하지 않고 전문가인 우리들에게 맡겨 놓으셨다. 이래라 저래라 일절 참견을 하지 않으셨다. 우리들을 철저하게 존중해 주신 것이다. 매년 가을에는 자문위원들과 함께 설악산 단풍여행을 가곤 했다. 여행을 전후해서 우리 위원들에게서 병원 운영과 관련해 여러 의견을 들으셨다.

유교적인 예의와 검소가 몸에 밴 분
처음 서관을 지을 때 방사선과와 검사실을 지하 1층에 두는 걸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방사선과 전문의인 내가 결사반대했다. 서울아산병원은 하나 같이 고가의 방사선과와 검사 장비들을 구입하기로 했는데, 병원이 한강에 인접해 있어서 만에 하나 수해라도 나면 그 비싼 장비들을 모두 못 쓰게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끝끝내 반대해서 결국 방사선과는 2층, 검사실은 4층에 두는 걸로 계획이 바뀌었는데, 실제로 1990년에 한강에 대홍수가 나서 서울아산병원이 물에 잠겼다. 다행히 그 비싼 장비들은 내가 고집을 부린 덕에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또 기억나는 일이 있다. 처음 서관이 준공되던 날, 설립자로부터 공로패를 받은 일이다. 그때 의료자문위원으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
 병원뿐 아니라 설립자와 관련해서도 기억에 남는 일이 많다. 1978년 5월, 보령아산병원 기공식을 마치고 상경하는 길에 1박하기 위해 도고온천에 들른 적이 있다. 그런데 동행한 자문위원들의 방 키를 비서를 통해 나눠 주어도 될 텐데 굳이 설립자께서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 일일이 방을 배정해 주셨다. 아마도 그것이 자문위원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유교적인 예의가 몸에 밴 분이구나 싶었다.
설립자의 검소한 모습과 관련해서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1982년인가, 프레스센터에서 재단 회의가 열렸다. 회의를 마치고 설립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게 됐다. 설립자는 수행원 없이 혼자이셨다. 퇴근시간 이후에는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내 차도 호출할 겸 설립자 차번호를 여쭸더니 “내가 부르지요” 사양하시곤 수위에게 가셨다. 7~8분을 기다렸더니 내 차는 나왔는데 설립자 차가 나오지 않았다. 설립자를 배웅한 뒤 떠나려고 다시 차번호를 여쭈자 역시 “내가 하지요” 하시곤 다시 수위에게 가셨다. 3~4분 뒤에 나온 차를 보니 스텔라였다. 그런데 기사가 차를 현관 앞에 바짝 세우니까 수위가 야단을 쳤다.
그래서 내가 수위에게 달려가서 “이봐요, 현대의 정 회장님을 몰라요? 사람을 봐야지, 차를 보고 사람을 차별하면 되겠어요”라고 나무란 적이 있다. 설립자께서 외제차나 고급 차를 타셨거나, 최소한 비서가 수행했다면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정장현 재단 사무총장에게 “퇴근시간 이후에라도 비서를 대동시켜 드리는 게 좋겠다”고 전화하자 정 사무총장은 “매번 당하시면서도 그러고 다니신다”고 대답했다. 그때 일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 자리를 빌려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설립자께서 재단을 설립하신 데는 정말 깊은 뜻이 있다. 설립자께서는 단순히 부(富)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이 번 돈을 사회에 재투자해서 소외된 지역의 노동력을 창출하고, 나아가 그 지역의 자활과 자립을 돕기 위해 재단을 설립하셨다는 말이다.
설립자를 뵈었을 때 재단 설립취지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다. 설립자께서는 ‘환원’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하셨다. 환원이란 거저 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설립취지에 대해 여쭈자 “재단을 설립해 보성이나 영덕 같은 의료 취약지역에 병원을 세운 것은 의료 신기술을 이용해 농촌 환자를 치유하는 데서 나아가 그 지역의 노동력을 증가시킴으로써 결국 우리나라의 노동생산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재단 잘 키우는 게 설립자 위하는 길
즉 설립자께서는 재단에서 설립한 병원들을 통해 병든 이들을 고치고 건강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력 자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그들의 자립을 돕고자 하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기업 이윤을 주민에게 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건강을 되찾은 그들이 지역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자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복지사업의 참뜻이라고 여기신 것이다.
설립자의 정치활동에 대해서도 남기고 싶은 얘기가 있다. 나는 설립자를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존경했지만, 정치를 하시려는 데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들을 기회가 있었다.
1991년 9월 무렵 프레스센터에서 재단 주최로 국제회의가 열렸다. 설립자께서는 다른 회의에 참석하셨다가 이곳에 오기로 하셨는데 사정이 생겨서 이전 회의에 가지 못하시고 재단 회의에 바로 오셨다. 회의 시작 30분 전에 오셔서 귀빈실에서 혼자 기다리고 계실 때 우연히 자리를 같이 하게 됐다.
할 말도 별로 없고 해서 “회장님, 그거(대통령 출마) 괜찮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다. “여보 김 박사, 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싸움 거는 사람 있소?”라고 대답하셨다. 내친김에 “왜 출마하셨습니까?” 여쭈자 “나는 명예나 권력욕 때문에 출마한 것이 아닙니다. 이 정부는 기업에 대한 규제가 너무 많아요. 내가 대통령이 되면 그런 규제를 풀어서 기업들의 국내와 해외 활동에 활력을 주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일의 초점을 경제 행위에 맞추시던 설립자의 인생과 경제 철학이 잘 드러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오랫동안 의료자문위원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재단과 병원을 잘 키우는 게 설립자를 위하는 길이라는 걸 명심하고, 관계자들이 좀 더 분발해 주길 바란다는 당부를 전하고 싶다.  (정리 유인종 편집부)

※ 김순용: 1922년 황해도 은율 출생. 평양의과대학 졸업. 경북대·경희대·한양대 의대 교수, 경희대 의대 부속병원 원장, 한양대 의료원 원장, 아산재단 의료자문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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