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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섬김 “5월 5일, 여성인권박물관 개관합니다” 조성진

1990년 11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약칭)이 처음 발족했을 때만 해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공개하고, 그해 12월 6일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뒤 김 할머니를 포함한 3명의 피해 할머니가 일본 법정에 흰 소복을 입고 출정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춰야 할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두꺼운 피부 아래 감춰진 종기처럼 드러내서 치료하고, 재발을 막아야 할 살아있는 역사였던 것이다.

위안부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다
정대협에서는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던 한국여성들을 2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일본군 사이에서 유행했던 ‘29대 1(여성 한 명이 상대하는 일본군이 29명이라는 의미)’이라는 말에서 추정한 숫자이다.
잔혹한 성폭력을 당하던 젊은 여성들은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군이나 연합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귀국했어도 대부분의 피해 여성들은 “절개를 잃었다”는 손가락질이 두려워 철저하게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김학순 할머니의 뜻있는 행동에 자극을 받아 정대협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234명이 등록했다. 이 가운데 지금은 중국과 일본, 미국에 거주하는 여섯 명을 포함해 63명만이 생존해 있다. 2011년 한 해에만 16명이 사망했다. 최고령자는 95세로, 정대협이 서울 서대문에 마련한 쉼터에서 다른 세 명의 할머니들과 함께 살고 있다.
정대협은 창립 이후 위안부 진상공개와 국가 주도의 범죄 인정,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 사료관과 추모비 건립 그리고 책임자 처벌 등의 7가지 사항을 일본 정부에 줄곧 요구해왔다. 참혹한 역사의 증인인 할머니 63명이 살아 있을 때 이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 그래서 할머니들로부터 “그래도 살아남은 것이 행운이었다. 내가 당한 피해를 밝힌 것이 잘한 일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정대협의 가장 큰 과제이다.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 있는 고백을 하고, 일본에 소송을 제기한 지 20년이 되는 해였던 지난 2011년에도 정대협은 의미 있는 여러 활동을 펼쳤다.
우선 8월 30일에는 ‘우리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방치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이끌어냈다. 또한 위안부와 관련한 교재를 제작했고,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할머니들을 모시고 경남 하동으로 나들이를 다녀왔으며, 서울 마포구 성미산 자락에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부지를 마련했다.
특히 12월 14일에는 1,000회째를 맞은 수요시위를 미주와 유럽, 아시아가 연대하는 시위로 만들어냈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한 평화비를 건립하는 업적을 일구어냈다.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에 맞춰 처음 시작한 수요시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그 수요시위가 19년 만에 1천 회를 맞은 것이다. 이날 시위에는 길원옥·김복동·박옥선·김순옥·강일출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5명과 정몽준 재단 이사장, 배우 이서진·김여진 씨 등 각계 인사와 시민 3,000여명이 참석했다.
정대협은 이날, 일본대사관 맞은편에 평화비를 제막해 참석자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각계각층의 성금을 모아 제작한 평화비는 높이 120cm로, 작은 의자에 걸터앉은 소녀가 조용히 일본대사관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이 평화비는 지난 겨울, 시민들이 목도리를 둘러주거나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는 등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사명감으로 일하는 정대협 활동가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는 정대협 근무자는 윤미향(47) 대표를 포함해 6명에 불과하다. 모두 여자들인데, 남자 활동가가 없는 이유는 잠시 뒤 설명하겠다.
사무처장과 팀장(2명), 간사 그리고 쉼터 소장의 나이는 20~50대이다. 정대협에 들어온 지 2년째인 허미례 간사가 막내인 20대로,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30대인 안선미 팀장은 건국대, 40대이자 재일교포인 양노자 팀장은 성공회대를 마쳤다. 11년째 근무하고 있는 김동희 사무처장은 30대로 감신대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했다. 쉼터 소장은 50대로 경기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윤 대표는 한신대 신학과를 마친 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과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활동가들의 학력을 밝힌 것은, 이들이 학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들의 월급은 대표를 포함해 그 누구도 150만 원을 넘지 못한다. 한 마디로 말해,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윤미향 대표는 말한다.
“가끔 학생들 대상의 강연을 가면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꿈을 가져보라”고 권합니다. 행복과 만족의 기준이 꼭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저 같은 경우, 1992년 처음 정대협에 들어와 간사로 일하면서 월급 30만 원을 받았을 때도 10만 원은 저금하고, 나머지로 기부도 하면서 살았거든요. 가난하게 살지 않는 방법은 돈을 잘 쓰는데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인지 정대협 활동가들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오래 버틴다. 다른 시민단체에 비해 이직률이 낮은 것이다. 한 번 들어오면 보통 7~8년은 근무한다.
활동가를 선발하는 특별한 기준이나 자격조건은 없다. 위안부 문제에 관심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급여 수준이 낮은 반면 노동 강도가 센 편이어서 남자 지원자가 없다고 한다. 출근시간은 오전 10시이지만, 일정한 퇴근시간이 없다. 낮에는 행사 준비와 교육 등이 많아서 저녁이 되어야 자기 일을 처리하는 까닭이다.
부드러운 것이 언제나 강한 법이다. 남자들에 비해 육체적으로는 가냘프지만, 정대협의 부드러운 여성들은 감춰진 역사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내면서 세상을 바꾸고 있다.

기적을 만들어주는 후원자들
정대협의 활동은 대부분 후원금과 <20년간의 수요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 같은 자료 판매비에 의존하고 있다. 후원금은 안정적이지 못하지만, 운영이 어려울 때마다 누군가가 기적을 만들어 준다.
지난 4월의 일이다. 어떤 재일교포 사업가가 정대협에 전화해서 위치를 확인한 뒤 수행 직원도 없이 혼자서 방문했다. 싱싱한 과일바구니를 들고 온 사업가는 “선친이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가방사업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일궜다. 정대협에서 제기하는 위안부 문제를 접하곤, 힘이 없어서 당한 우리 세대의 일인데 정대협에서 큰일을 해주고 있다고 늘 대견스러워하셨다. 기회가 닿으면 정대협을 도와주라는 선친의 유지를 실천하러 왔다”면서 1억 원을 쾌척했다.
정대협이 세들어 있는 서울 연건동의 건물 주인은 보증금과 월세를 싸게 받으면서도 매달 5만 원씩 꼬박꼬박 후원해 주고 있고, ‘후원의 밤’을 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참석해 힘을 실어 준다며 윤 대표는 밝게 웃었다.
“특히 지난해에는 아산재단이 우리에게 ‘아산상 특별상’이라는 큰 상을 주셨어요.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아산재단은 1995년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을 평생 무료로 진료하는 등 꾸준히 지원하고 계신데 다시 이렇게 큰 상을 받아도 되는 건지 송구스러운 한편 뿌듯했습니다. 그건 우리 정대협의 활동이 복지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았다는 증명이기 때문이죠.
아산상은 상금도 1억 원이나 되었죠.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부지는 마련했지만, 건립비용 마련이 어려워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산재단 덕택에 오는 5월 5일 박물관 개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헤쳐 나가는 힘을 주는 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이다. 개인생활을 공적인 영역에 투입하고 있는 정대협의 활동가들 또한 아산재단 같은 곳에서 격려해줄 때 큰 힘을 얻는다.
그러나 가장 큰 보람은 아무래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로부터 얻는다. “당신들 덕택에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할머니들의 말은 어떤 고통도 스르르 사라지게 만드는 만병통치약이다. 다시는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성폭력 피해여성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라는 할머니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정대협의 ‘아마조네스’들은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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