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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무총리실에 근무할 때 서울올림픽과 인연을 맺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제1행정조정관(1급)으로 근무했는데, 서울올림픽 유치 작업을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실무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24회 올림픽 개최지 선정 투표’에서 서울이 일본의 나고야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누르고 개최지로 결정된 뒤에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를 창설, 실무를 주관하는 제2사무차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내가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설립자를 처음 만난 건 1981년 5월 무렵이었다. 설립자는 그때 올림픽 유치추진위원장에 임명되었는데, 나도 유치위원회에서 근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올림픽 유치 업무를 행정적으로 지원하면서 실무를 총괄하는 역할이었다.
어떤 위원회의 위원장이라고 하면 이름만 걸어놓고 활동은 미미한 경우가 많지만 설립자는 의례적인 위원장이 아니라 사명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하였다. 당시 설립자는 현대그룹을 이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경련 회장이어서 유치 활동에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설립자는 열정적으로 유치 활동을 펼치면서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소문대로 자신감이 넘치고 강력한 추진력을 지닌 분이라는 첫인상을 받았다.
정부나 체육계 일부에서 올림픽 유치에 부정적인 의견이 없지 않았지만, 유치위원회 내부에서는 의욕적인 설립자를 중심으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자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넘쳤다. 일각에서 올림픽 유치에 비관적인 이유는 ‘돈’ 때문인데,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올림픽을 치를 나름대로의 계산이 섰던 설립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했다.
“우리에게 올림픽을 치를 능력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렇게 큰돈이 들 것 같지 않습니다. 지하철 건설이나 도로 공사는 올림픽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해야 할 일 아닌가요? 경기장도 86 서울아시안게임을 위해 짓고 있는 잠실경기장을 활용하면 되고, 선수촌도 아파트를 지어 미리 팔아놓고 올림픽에 먼저 쓰는 식으로 해결하면 올림픽에 드는 진짜 비용은 얼마 안 될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표를 얻도록 노력해 봅시다.”
설립자의 이런 계산법은 유치추진위원들을 고무시켰고, 비판론에 맞서는 무기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우리 대표단 106명은 9월 20일 독일 바덴바덴에 입성했다.
바덴바덴 현지에서는 설립자의 왕성한 활동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많았다. 나는 실무를 준비하느라 보통 새벽 5시 반이면 일어났다. 그런데 설립자는 이미 그 전에 기상해서 국제전화로 서울의 현대그룹 본사와 각 나라의 지사에 업무 지시를 마친 상태였다. 그런 뒤 유치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정말 부지런한 분이구나 싶었다.
대화솜씨 뛰어난 설득의 달인 또 현대의 프랑크푸르트 지사를 거의 전부 바덴바덴에 옮겨 놓았다. 채수삼 지사장 이하 전 직원들이 출동해 유치 업무를 지원해 주었고, 아드님인 정몽준 당시 현대중공업 부사장과 제수인 장정자 여사께서도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은 채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두 분도 정말 애 많이 썼고, 완전히 현대의 총력전이었다.
현지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IOC 위원들의 표심(票心)을 잡는 것이었는데, 유럽의 IOC 위원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당시 독일의 IOC 위원은 유명한 재벌이었다. 우리 쪽에서 아무리 접촉을 해도 그 사람은 우리를 만나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설립자가 끝내 만나 설득해서 우리를 이해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고 ‘정말 설득의 달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달여 동안 설립자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걸 느끼고, 배우고, 존경하게 됐다.
당시에는 북한 대표단과도 접촉이 있었다. 북한 대표단이 서울로 결정되지 않도록 방해 공작을 펼 것 같다는 정보가 있어서 우리 쪽에서 만나자는 설립자 명의의 편지를 전달하고 그랬다. 그런데 그들이 접촉을 피했다. 9월 30일, 개최지 결정을 위한 IOC 총회가 열리는 날 우리 대표단은 아침 8시쯤 총회장으로 갔다. 그랬더니 북한 대표단이 입구에 벌써 와 있었다. 입장하는 IOC 위원들을 대상으로 훼방을 놓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설립자가 성큼성큼 그들에게 걸어가더니 “나는 정치를 싫어하지만, 이건 남북의 문제가 아니고 한일간의 경쟁인데 북측이 보이지 않는 방해를 하려는 건 온당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 아쉽고 서운하다”면서 평소 지닌 기업관을 술술 풀어놓았다. 북한 대표단이 설립자의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달변에 빠져 있는 사이에 IOC 위원들은 속속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북한의 의도가 보기 좋게 무산된 것이다. 그때 설립자의 말씀을 들으면서 대화 솜씨가 정말 뛰어나서 감탄한 기억이 난다.

사익 미루고 공익 앞세우다 총회가 열린 오전만 해도 외국 기자들은 모두 나고야에 베팅을 했다. 서울이 안 된다는 거였다. 하지만 오후에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외국 기자들이 서울에 베팅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대표단은 이런 분위기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승산이 있고 낙관적이라는 분위기였고, 결국 오후 3시 45분의 투표 결과 서울이 52표를 획득해 불과 27표를 얻은 나고야를 누르고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이유는 우리 대표단에 속해 있던 모든 분들이 열심히 활동한 덕택이다. 이미 착공했던 메인스타디움도 점수를 많이 얻은 요인이 됐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가장 큰 공로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설립자이다. 설립자의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이 없었다면 절대 올림픽을 유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올림픽 관련 이권사업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1983년 무렵의 일이다. 설립자가 대한체육회장(1982. 7~1984. 9)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올림픽선수촌을 민간사업으로 할 것이냐, 서울시 주도의 공영사업으로 할 것이냐 논의가 분분했다.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오전 10시에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나는 현대건설의 소유자인 설립자가 당연히 민간개발을 제안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설립자의 참석을 막으려고 회의 직전에야 연락을 드렸더니 서둘러서 오시겠다고 했다.
김상협 국무총리, 노태우 내무부 장관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서석준 경제부총리는 민간사업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내가 정부가 재정 지원을 할 것이냐는 반론을 폈더니 그건 못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설립자가 발언권을 얻더니 공영사업으로 한 뒤 그 수익금으로 서울올림픽을 꾸려 나가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수익이 불안할 때는 민간사업으로 하고, 수익이 분명할 때는 공영사업으로 하는 게 낫다”는 논리였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정말 놀랐다. 선수촌을 건립하는 데 참여하는 건 굉장한 이권인데, 거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려는 깔끔한 모습을 보면서 설립자에 대한 존경심이 상종가를 친 것이었다. 사익을 미루고 국익과 공익을 앞세우는 통 크고 통찰력 있는 모습과,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철학과 신념 앞에서 정말 놀라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
결국 선수촌은 공영개발해서 크게 성공했다. 서울시는 2천억 원 이상의 수익을 거두어 부근의 올림픽공원과 진입도로 등 공공사업을 진행했고, 1천억 원 이상을 올림픽조직위원회의 기금으로 전환해서 큰 흑자를 거두게 했다. 이 또한 설립자의 덕택이다.
서울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며 설립자와 호흡을 같이 하는 행운을 누렸다. 가까이에서 본 설립자는 정규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인간과 역사에 대한 투시력과 통찰력을 가진 분이었다. IOC 총회가 열리던 날 아침, 북한 대표단을 설득하던 모습을 보면서 상대방을 빨아들이는 대단한 힘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역시 대인이었다. 또한 창의적인 발상으로 대단한 족적을 여기저기에 남긴 창조자였다. 그런 면에서 존경할 수밖에 없는 큰어른인 것이다.
나는 지난 2009년부터 ‘2014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우리 현대사의 거인인 설립자와 함께 한 서울올림픽의 경험을 살려 인천아시아경기 또한 성공적으로 치러낼 것이다.
※ 이연택 : 1936년 전북 고창 출생. 총무처·노동부 장관,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대한체육회 회장 역임. 현재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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