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위하는 마음…, 분야는 다르지만 저는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님을 존경합니다. 우리 모두 그분의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아산병원 8층 외과 사무실, 바쁜 수술일정 중간에 잠시 시간을 내준 안세현(54) 교수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이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 답변은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모습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듯했다. 안 교수는 유방암 전문 의사로 서울아산병원 유방암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의사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유방암 환자들을 위해서 1억 원이 넘는 사비를 들여 쉼터를 만들고, 정기적으로 환자들과 찜질방 모임을 마련하면서 그들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한다.
물론 봉사만이 그의 전부가 아니다. 의사로서의 실적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암 수술 자료에 따르면, 서울아산병원은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 연속 유방암 수술 국내 1위를 했다. 작년에는 1,921건을 수술했는데 안 교수팀이 1,700여건을 집도했다. 안 교수는 외래진료로도 반나절 동안 120여명의 환자를 진료한다. 하루 24시간을 꼬박 써도 부족할 것 같은 일정을 소화해 내지만 그의 얼굴에는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연구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섰을 때도 그는 환자를 위한 진료기록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었다. 그의 신념과 차분한 목소리, 말투 등에서 어릴 적 머릿속에 떠올리던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진료실에 들어서면 백발에 하얀 가운을 입고 미소를 짓는 중년 의사의 인자한 모습 말이다.
지방환자 위해 자비로 쉼터 마련 안 교수는 환자를 병원에서만 만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그는 찜질방을 통째로 빌려서 유방암 환자들과 만난다. 이날은 유방암 환자들이 평소 물어보고 싶던 것들을 안 교수에게 질문하고 답을 듣는 시간이다. ‘서울아산병원 핑크리본회’로 붙여진 이 모임은 2시간여 진행되는데 100여명이 모인다. 모임이 시작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안 교수는 “환자들이 진료실이나 병실에서 물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알려주는 시간”이라며 “유방암 환자들은 목욕탕에 못 가니까 이날은 통째로 빌려서 목욕을 하면서 상담도 받는다”고 말했다. 환우들은 편안하고 자상한 안 교수의 팬이 될 수밖에 없다.
‘새순회’도 있다. 새순회는 핑크리본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20여명의 환우들로 구성된 자원봉사 모임이다. 스스로 병원에 찾아와 유방암 환자들을 돌봐주고, 자신의 투병생활을 바탕으로 상담도 해준다. 안 교수를 접한 뒤 그의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 동참하는 환자들이다. 안 교수는 한 발 더 나아가 자비를 들여 ‘새순쉼터’를 만들었다.
“유방암은 방사선 치료를 오래 받아야 하는데 지방 환자들은 여관이나 고시원에서 지내며 치료받는다고 하더군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다가 환자들이 지낼 곳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안 교수는 2005년 7월, 서울아산병원 부근의 한 아파트를 전세로 계약하면서 새순쉼터를 만들었다. 안 교수가 1억4천만 원을 대출받아서 냈고, 새순회 환자들과 개인의 후원금으로 3천만 원을 보태면서 전세금이 마련됐다. 5년여 동안 500여명의 지방 환자들이 거쳐 갔다. 하루 숙박비는 1만원. 자원봉사 간호사가 상주하면서 환자들을 돌보고, 안 교수팀의 전문의도 교대로 찾아가 상담한다.
‘환자중심’의 철학을 의료현장에서 실천 의사로서 그의 철학은 ‘환자중심’이다. 이를테면 환자에게 단어를 사용해도 의학용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유두 분비물’은 ‘젖꼭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쉽게 풀어서 말한다.
핑크리본회도 마찬가지다. 평소 외래진료가 바빠서 제대로 상담을 못 하는 환자들을 배려해 시작한 것이며, 장소도 목욕이 어려운 유방암 환우를 배려해 찜질방으로 정했다. 안 교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치료인 만큼, 여러 방법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그 중에서 환자가 선택하도록 조언한다”고 말했다.
반면 제자들에게는 따로 환자중심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외래진료나 회진할 때 환자를 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배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환자중심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느끼며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다.
환자중심은 그의 진료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안 교수는 “임상의사는 환자를 잘 보고, 많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안 교수는 국내외를 통틀어 유방암 수술 실적이 가장 많은 의사다. 하루 일과를 모두 진료와 수술로 보내는 안 교수는 연구는 일과 외의 시간을 이용하며, 토요일 오전은 회진, 일요일은 신앙생활로 보내고 있다. 그는 진료 시스템도 개편했다. 안 교수는 유방암으로 진단된 환자만 진료하고, 암이 아닌 환자는 임상조교수를 통해 진료하도록 했다. 밀려드는 환자에게 빠른 진료를 하기 위해서이다. 유방암만 진료하는 스태프도 별도로 배치했다. 안 교수는 “암환자는 오래 기다릴 수 없으니까 되도록 빨리 진료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의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자 이런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의사도 사람이고, 환자도 사람입니다. 내가 잘나고 당신이 못나거나, 당신이 잘나고 내가 못난 것이 아니라 모두 사람인거죠. 다만 서로의 역할이 다른 것뿐입니다.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는 사람인 겁니다.”
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물어봤다. “환자들에게는 긍정적인 생각이 필요합니다. 환자들에게 다가올 미래가 나쁠 수도 있지만, 유방암은 예전만큼 심각하지 않아요. 환자들에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두 가지 질문의 대답에서 안 교수의 사람을 위하는 긍정적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병원 1층에 정주영 설립자의 흉상이 있습니다. 항상 베풀고 나눈 그분을 요즘 정치가나 공무원들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위하는 마음은 의사와 정치가, 공무원뿐이 아니라 환자와 국민도 모두 따라가야죠.”
‘사람을 위하는 마음’을 따라가야 한다는 그에게 환자들이 왜 그토록 열광하는지 이해가 될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