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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편지 무의미한 일의 유의미를 억지부리며 유안진

만나면 곧잘 입은 옷이 언급된다. 서로들 못 보던 옷이라느니, 패션감각이 뛰어나다느니, 코디를 고용했느냐 등등의 말짱 헛소리다. 그냥 빈말을 주고받는다. 그럴 때마다, 다들 빈말의 남발에 잠시잠깐 묘한 공허감을 왜 아니 느끼랴마는, 입다물고 서로를 따분하고 어색하게 하는 것보단 낫다. 얌전빼고 품위 있는 것보다는, 주절주절 실언도 실수도 흘려, 서로를 편하게 하는 이들이 좋다. 다들 공허해서 그러니까….

옷장을 열면 옷이 너무 많다. 다 입자면, 해어질 때까지 입자면, 100~200년은 더 살아도 부족할 거라는 내 말에 다들 웃어댄다. 옷은 쌓였는데 입을 옷은 없다는 얘기, 옷집만 보면 어느새 들어가 있고, 세일딱지만 보면 들어가게 되고, 약속장소를 백화점으로 하면 맘에도 안 드는 옷을 사게 된다고, 사 놓고 안 입은 옷이 수두룩한데도 어느새 사들고 나오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울기까지 했다는 이도 있다.

일종의 중독이라고도 하고, 술도 못 마시는데 그런 재미도 없이 왜 사느냐고, 싸구려 한두 가지로 스트레스 푼 건데 그게 몇 푼이라고 쩨쩨하지 말자는 등등, 반성과 변명도 많고 합리화도 만만치 않다. 여성은 나이 들수록, 생활의욕 잃지 않게 늘 새 옷에 관심 놓지 말라는 충고도 듣는다. 다 옳고 우정 어린 충고이고, 밑줄 그어야 할 금과옥조 같다. 그렇게 의견은 분분해도 흐지부지 하다만다. 무의미할수록 흐지부지가 좋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말만 하며 살 수는 없지. 그런 말이야 주요인사들의 중요모임에서나 나올 테니까…. 그런 말은 중대발언이고 중대공표라서 신문방송에서 하도 들어 지겹기도 했는데, 나꺼정 중요발언을 하면 지구가 무거워 자전도 공전도 다 못 할 테니까. 또 우연히 마주쳐 차 한 잔 나누는 데야 흐지부지 말이 부담 없어 더 좋지.

왜 그랬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짠순이는 절대 아닌데. 쌓인 옷이 너무 많아 그랬을까? 아무튼 지난 일년동안 나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환경재앙이니 무분별한 소비, 병적 소비, 절약 등등 어떤 의미부여를 떠나서 그냥 그래보고 싶었다. 딱 일 년만이라도 양말 한 짝도 안 사며 살아지는지 어디 한번 시도해보자고.

우선 동네가게에 미안했다. 같은 동네에 30년 이상 살자니 커피도 얻어 마시고, 마주치면 인사도 주고받아온 이웃의 여러 옷가게에 정말 어색해졌다. 발길을 끊은 이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한 해를 살아냈다. 그렇게 살아보니 별 불편 없이 살아지더라는 것이다.

새 스타킹 안 사니 바지를 자주 입게 되고, 안 입던 옛날 옷도 자주 입게 되었다. 칭찬인지 꼬집는 말인지는 몰라도, 옛날 옷이라 새롭다는 말도 들으면서. 실험하고 시도할 게 없어 그걸 자랑이라고 글로 쓰느냐고 욕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왠지 그 짓은 그렇게 해봐도 될 것 같아서, 시험인지 실험인지를 해봤다. 물론 저절로 옷집을 기웃거렸지만, 사고 싶은 것도 살 것도 없었다. 때로는 필요한 것 같아 집어들었다가도 ‘금년에는…’ 하고는 비슷한 것, 좀 안 맞는 걸 찾아 써보니 별 불편도 없었다.

사람됨이 비뚤어졌는지, 남들과 반대 짓을 잘 한다. ‘버리자! 3~4년 안 입었으면 과감하게 버려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버리고 나면 누가 사주지? 버린 빈자리는 누가 책임져주지? 소득재분배라고? 좋은 말이야. 무책임한 말을 무책임하게 잘들 한다. 죽을 듯 아파도 결근도 못 했고, 피 뽑아 써온 원고료였는데….

입을 만할 때 버리는 걸 나눔이나 자선쯤으로도 말한다. 그러나 입던 옷의 나눔은 가족이나 친지, 친구사이라도 어렵다. 하도 부러워해서 아까운 걸 맘먹고 주었는데 그냥 버리는 것도 봤다. 오해까지도 받아봤다. 성당이나 뜻 있는 모임에서 헌옷 모으기도 한다. 그럴 때도 새 옷처럼 세탁하고 반듯하게 다림질해서 가져오라고 한다. 그렇게 자선이나 기부는 입을 만한, 자기 자신에게도 아까운 것을 작정하고 해야 한다.

대학생 때 입던 옷도 한두 가지 발견된다. 물론 안 맞는다. 그땐 그걸 사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볼 때마다 잠시 아픔도 생각난다. 그때의 꿈은 먹고사는 것만이 아니었는데, 반성도 하게 된다. 좋은 글을 써야지, 다짐했던 젊어 푸르렀던 그때가 생각나, 좋은 글을 못 써도 쓰는 일을 놓지 않은 것으로라도 위로 받고 싶고, 좋은 글의 압박감도 느껴진다.

좋은 글이 어떤 글이지? 무수히 반문해온 물음으로 다그칠 수 있어 좋다. 그럼에도 번번이 풀어지고 늘어지며 비감해지지만, 할 수 있는 짓이 고작 이런 짓뿐인가? 그러나 내가 사는 식을 내 마음대로 해본 시도였고 그런 대로 괜찮았으니, 의미 없이 시도했던 무의미에 굳이 의미를 따질 게 아니지.

시간이 모여 세월이 되고, 작은 일들이 이어지고 쌓이면서 삶이 되고 인생이 되는 거지. 소천하신 김수환 추기경님 농담처럼, 삶이란 삶은 달걀이지. 삶이라는 글자를 풀면 사람이 되지. 사람이란 살아가는 존재이지, 사람들이 사는 건 다 삶이지. 이런 가소롭고 시답잖은 글을 쓰는 나는, 지난 한 해를 가소롭고 시답잖게 살아왔다고 공포함으로써 혹시 나처럼 가소롭고 시답잖게 살았다고 아파할 분들과 공감을 나누고 싶다. 창밖 눈바람 속 앙상한 푸나무들이 열매 없이 살았어도 무의미하게 살았던 게 아니라고 우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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