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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야기 의학 연구와 방사능 피해 이재담

1895년 말에 이루어진 뢴트겐의 엑스선 발견은 세상에 알려지는데 가장 짧은 세월이 걸린 연구로 유명하다. 논문이 12월 28일에 나왔는데, 며칠 후인 1월 초에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이 엑스선, 즉 물질을 투과하는 새로운 빛의 존재에 관해 알게 되었다.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새해 첫날, 논문에 첨부되어 있던 ‘뢴트겐 부인의 반지 낀 손을 찍은 엑스선 사진’을 게재한 오스트리아의 신문이었다.

연구자들은 이 물리학적 발견의 의학적 용도에 주목하였다. 의학, 물리학, 공학에 정통한 인재들이 모여 있던 빈에서는 최초로 연구소가 설립되어 각종 질병의 진단에 엑스선이 유용함을 확인하였다. 또 유럽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던 신대륙에서도 곧 방사선 의학이 새로운 전문분야로 대두되었다. 세계 최초의 방사선 전문의사라고 할 수 있는 보스턴의 프랜시스 윌리엄즈는 같은 해 4월에 이미 엑스선을 이용하여 결핵, 암 등의 폐질환을 진단하였고, 11월에는 유방암 치료에도 효과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엑스선이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엑스선 발견 이후 약 2년이 흐른 1897년경에 방사능이 인체에 축적되어 독성 물질과 비슷한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상당기간 방사능에 노출되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다음의 일이었다.

1897년부터 뢴트겐과 함께 엑스선을 연구했던 존 스펜서는 썩어가는 양손을 차례로 절단해야 했다. 처음으로 방사선을 이용해 영상 진단을 연구한 빈 대학 엑스선연구소장 구스타프 카이저는 중증 방사선 장애로 은퇴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초기 방사선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이디오 홀츠크네히트는 손상된 손을 절단한 이듬해 사망했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질병 진단에 엑스선을 도입한 존 홀 에드워즈 역시 손을 절단한 후 평생을 극심한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은 한쪽 눈에 손상을 입었으며, 그의 조수 클라렌스 데일리는 방사능 장애로 장기간 고통 받다 사망하였다. 방사성 물질의 연구를 시작한 후 라듐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의 사인도 방사능에 의한 악성 빈혈이었다.

여담이지만 엑스선은 돌팔이 의사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 그 첫 번째 피해자는 환자의 발 뼈가 골절된 것을 모르고 운동을 권장했던 정형외과 의사였다. 피고 측 변호사는 법정에서 엑스선 사진을 증거로 채택하지 못하도록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소송에 졌고, 의사는 막대한 금액을 배상해야 했다고 전한다.

최근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우리나라에서도 방사능 피해를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에서 수입한 생선이 팔리지 않고, 아이들이 방사능 물질이 섞인 비를 맞을까 걱정하여 비오는 날 휴교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사고가 난 곳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지역이라면 일 년 동안 누적되는 방사능의 총량은 병원에서 컴퓨터 단층촬영을 한 번 찍는 양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방사능 피해를 과도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참고로 엑스선 발견자인 뢴트겐은 방사능으로 인한 장애를 겪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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