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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그대가 되어 갈현동 ‘동네 며느리’ 이인영




“고추씨 갈아 넣어 붉은 색이 도는 된장이 맛있어요. 아~ 함 잡숴 봐…”
서울 갈현2동의 주민들이 ‘동네 맏며느리’라고 부르는 윤희정(65) 씨는 처서가 코앞에 다가온 어느 아침, 장독에서 된장을 퍼 담았다. 그리고 싱싱한 사과, 천도복숭아 몇 알도 정성껏 씻어 함께 들고 자신의 집 가까이에 홀로 사는 천병숙(82) 할머니의 지하 빌라를 찾았다. 그가 손가락에 된장을 찍어 할머니 입에 넣어 줬다.
“맛있어.” 할머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천병숙 할머니도 그에게 미리 준비한 선물을 준다. 오면 주려고 아껴 둔 파운데이션이다. 묵묵히 선물을 바라보던 윤희정 씨가 한 마디 던진다. “저 속옷도 사주세요. 지난 번 사주신 것과 같은 사이즈로. 헤져서…”
할머니는 그가 고맙다. 선물을 받아주고, 김장이며 된장이며 직접 담가 이렇게 오랜 세월 나눠주는 사람. 살림살이 다 알고 드나들어 주는 이가 있어 너무 반갑고 맘이 든든하다. 윤희정 씨도 할머니가 고맙다. 곱게 떠준 조끼며 속옷들이 너무 소중하고 아까워 떨어질 때까지 입는다.
2003년 선일여고에서 교직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한 윤희정 씨. 그는 30여 년 간 세계사 선생님으로 제자들에게 삶의 지식과 지혜를 알려준 ‘훌륭한 스승’이었으며, 은평구 갈현2동에서는 수더분한 토박이 아줌마로, 또한 ‘재소자의 어머니’로 살아왔다. 박봉을 털어 수십 차례 학비를 지원하고, 매년 서울 구산동, 불광동에 사는 독거노인 등 200여 가구에 돌아가며 연탄, 김치, 밑반찬 등을 제공해왔다. 그러려니 해마다 서너 말의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김장철에는 배추를 150포기씩 담갔다. 은평천사원, 우성원 등 10개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고, 교도소 재소자들과는 오랜 세월 편지를 주고받았다.

“언제 방학해?” 동네 분들이 묻곤 했다. 둘째 아들 태어나고 한 달 후부터 막다른 골목길의 단독주택에서 죽 살아온 그는 아예 방 하나를 동네 사랑방으로 내주었다. 퇴근 후, 방학 때면 찾아드는 어른들과 나지막한 상을 상시로 펴놓고 감자 옥수수를 찌고 수박 등을 쪼개 먹으며 참으로 즐겁게 지냈다. 대추나무 할머니, 문씨 할머니, 태극이 할아버지, 신식할머니, 구식 할머니 등  열댓 분의 어른들이 이곳에서 애환을 나누었다. 끼니를 걱정하는 노인들이 찾아오면 언제든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고 밝은 날엔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노래자랑을 열고 춤도 추며 지냈다. 골목 행상 아주머니들이 들러서 들려주는 이웃의 딱한 소식을 듣고 탄원할 일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제자들도 오가며 선생님의 집에 들러서 라면도 끓여 먹고 가곤 했다. “배고프면 아무 때나 들러서 밥 먹고 가렴” 하는 선생님이 계시기에.
연탄배달 봉사에는 여학생 제자들도 참여시켜 봉사의 기쁨을 알도록 했다. 은평구 구산동 산동네 폐결핵 환자촌 200여 가구의 어려운 노인들을 본 그. 1990년 다른 봉사자와 함께 사비를 털어 연탄 1,000장을 샀다. 공장에서 직접 떼어다 연탄을 전깃줄로 묶고 제자들과 함께 한 손에 4kg씩, 8kg을 양손에 나눠 들고 날랐다. 구불구불한 산 골목길을 올라야 했기에 학생들은 팔이 떨어져라 고생을 하며 땀을 흘리고 얼굴에는 검정을 묻혔다. 제대로 노동을 한 제자들은 모닥불에 언 손을 녹이며 말했다. “이런 봉사는 처음 해봤어요. 왠지 시꺼먼 연탄 앞에서 편한 것만 알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요. 기회 있으면 다시 해보고 싶어요.” 했다. 그 후 매년 계속된 연탄배달은 봉천동, 불광동, 길음동으로 이어졌다. 이 일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며 2004년부터 새마을회에서 실시한 ‘연탄 200만장 전하기 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따뜻한 불길이 퍼져나갔다.
학교 교실 창가에 화초 외에도 쪽파, 수세미를 심은 선생님. 선생님은 쪽파를 학생들과 함께 다듬으며 “내일 이걸로 김치 담가 올게, 비벼 먹자.”하고는 정말 다음 날 김치를 담가와 큰 양푼에 하나 가득 넣고 비며 제자들과 나눠먹었다. 선생님은 학교가 즐거운 곳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김 선생님이십니까? 형님이 보내셨습니다. 타시죠.” 하루는 검정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차 문을 열었다. 93년부터 청송, 무안, 홍성, 유성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장기수들과 편지를 나눠왔던 윤희정 씨. 재소자 중 유명했던 서진룸싸롱 사건의 모 씨와도 편지를 나누고 눈이 나빠진 그에게 안경을 보내는 등, 정을 전해왔던 터였다. 그도 윤 선생님의 가르침에 눈물로 통회하며 새 삶을 찾아가던 자신의 모습을 보내왔었다. 그가 사회에 나와 개업식을 하는 날 윤희정 씨를 초대했다.
“가운데 다 비켜라!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울 때 도와주신 어머니시다.” 그 한 마디에 모두들 가운데 길을 열고 물러섰다.
“어머니 큰 절 받으십시오!” 하더니 무릎을 꿇었다. 코끝이 찡해왔다. 고물상을 하는 그는 지금 좋은 모습으로 어려운 이들 후원도 하며 새 삶을 살고 있다. 윤희정 씨가 실린 잡지를 보고 편지를 보내온 한 수인에 의해 시작된 교도소 봉사. 겨울이면 두둑한 속옷과 버선 등을 보내고, 용돈을 넣어주고, 글을 못 깨우친 수인에게는 한글을 공부하게 했던 선생님. 한 수인은 ‘40년 만에 처음 편지를 써본다’고 했으며 어떤 장기수는 “장님이 눈뜬 것 같은 기분입니다. 죄인이지만 어머니를 만나 행복한 놈입니다.”라고 고백했다. 500통의 편지로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주고 받았다.

그는 좋은 가족을 만났다. 남편과 두 자녀는 그를 지원하고 격려했다. 빈털터리가 될 정도로 후원을 하는 그를 남편은 연탄지게를 지며 도왔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장학금을 후원하던 분이고, 어머니는 거지가 오면 반드시 더운밥을 지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인연으로 현재 송호대학의 이사로 있으며, 지금은 은평구 주민자치위원이며, 상담가, 그리고 중증 장애아동을 지원하는 초록장애우 이동봉사대 기획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그는 사람이 좋다. 새벽 4시면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돈다. 동네 사람들도 그에게 으레 정보를 준다. ‘어느 집 누가 아파요.’ 그는 관심을 기울여 듣는다. 눈이 오면 눈을 비로 쓴다. 어른들이나 제자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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