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오늘하루 그대가 되어 이중언어강사로 일하는 베트남 며느리 이인영

“안녕하세요? 더우시죠?”
마중 나온 베트남 결혼이민자 윙테이홍상(한국이름 이도연·27) 씨가 통통 튀는 목소리로 반긴다. 대구 달서구 죽전동의 한 주택 2층으로 안내하는 발걸음도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가볍다. 2004년 한국으로 시집온 20세의 여성. 심장병을 앓고 있던 시아버지(2011년 4월 작고)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말 없는 남편 신봉기(대산금속 근무·37) 씨와 함께 두 아들을 키우며 행복한 가정을 이뤄왔다.
“차에 얼음이 너무 많구나!” 시어머니의 한 마디에, 웃음소리와 함께 “네!” 하더니, 오미자 차 컵에서 냉큼 얼음을 덜어낸다. 그의 말에는 웃음이 깔려있다. “우리 집 보물”이라며 며느리 칭찬을 아끼지 않는 시어머니를 이해할 것 같다.
아들이 말이 통 없어 연애가 되지 않는 걸 아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일찍부터 베트남으로 향했다. 결혼정보회사를 통했지만 며느리만큼은 마음에 드는 며느리이기를 바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밝고 복성스러운 인상에 모두 끌렸지만 며느리 후보도 찬찬히 상대를 살펴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린 마음에도 자식의 결혼에 관심이 많은 가정이라 믿음이 갔다는 며느리. 밝음만이 아니었다. 근면하고 총명하고 용감한 아가씨는 볼수록 정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 가정의 화사한 햇빛 같은 존재가 된 건 순전히 그의 성격 때문이다.

농사 돕던 효심 많은 소녀
베트남 남부 호치민에서 차로 6시간쯤 떨어진 ‘속장’이라는 시골. 부모는 소농이었고, 2남 2녀의 아이들은 잘 자랐다. 사탕수수 농사며, 옥수수, 호박, 오이 등 채소와 망고스틴, 오렌지, 자몽 등 온갖 과일을 재배했다. 아버지는 강에 그물을 쳐 물고기를 한 광주리씩 잡곤 하였다.
“싱싱하니까 사주세요, 아줌마!” 초등학교 1년 때부터 둘째딸 윙테이홍상은 장사를 잘 했다. 베트남은 더워서 아침 7시 15분이면 학교가 시작돼 11시 30분이면 끝난다. 아이들은 모여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지만 윙테이홍상은 부모님 농사짓는 걸 도와드리고, 먹고 남는 채소와 물고기를 팔러 씩씩하게 다녔다.
“난 안해.” 언니는 부끄러움을 타 장사를 안 했지만 남동생은 무거운 광주리를 들어주며 적극 도와주었다. 풀 방구리에 생쥐 드나들듯 집을 들락거렸다. 한 광주리 팔면 다시 집에 달려가 또 한 광주리 가지고 나오고…. 서로 다 아는 사이인 동네 어른들은 신통하다며 잘 사주었다. 베트남 고향에서는 새벽 4시면 일어나 서로 부르며 모여서 차를 함께 마시고 식사도 함께 하는 등 이웃과 정답게 지낸다.
남의 밭에 비해 윙테이홍상네 밭은 늘 시끄러웠다. 가족이 노래도 같이 부르고 웃음꽃을 피우느라 조용할 날이 없었다. 가난했지만 즐거웠던 그 기억이 새삼 떠오르는지 미소를 짓더니 침을 삼키는 윙테이홍상.
“얘가 얘기하니 고향 음식이 먹고 싶나 보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대견하고도 안쓰럽다. 윙테이홍상이 고3 때, 아버지가 장 종양 수술을 하는 등 많이 아팠다. 언니는 대학교 3년이었고 밑으로 남동생 둘이 있었다. 언니가 1년 후 졸업해 선생님이 되면 남동생 둘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 집안 형편상 공부를 포기하려는 윙네이홍상을 붙들고 친구들과 선생님이 함께 울었다. 대학교 꿈은 접었다. 한국처럼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이지만 아무 힘이 돼줄 수가 없어 가슴 아파하셨다.
“나, 다른 나라에 시집갈래요.” 윙테이홍상은 TV를 통해 좋아하게 된 한국으로 시집갈 결심을 했다. 또 다른 공부가 기다리고 있는 먼 한국 땅으로. 그에 힘입어 언니는 선생님이 되어 공무원인 형부와 결혼했고, 큰 남동생은 병원의 전공의, 막내 남동생은 경찰공무원이 되었다.
윙테이홍상은 시집와 사계절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곤 했다. 가을 단풍에 반하고, 다양한 봄꽃들에 즐거워했다. “눈이 내려올 때 너무 예뻐요. 난생 처음 봤어요” 하는 그다. 남편은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조용해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이고, 윙테이홍상이 집안을 헤저으며 활기를 불어 넣는다.

‘채소장수’에서 ‘이중언어 강사’ 로 바꾼 꿈
‘내가 잘 하면 잘해 주시겠지’ 생각한 윙테이홍상이 옳았다. 한국에 와서, “뭐 할래?” 하고 묻던 시어머니에게 “채소장사 할래” 했던 며느리. 그는 시부모님이 좋았다. 시아버지는 “우리 며느리 최고”라며 여행을 데려가시고, 어머니는 많은 걸 가르치고 이끌어 주셨다. 시어머니는 딸자식 하나 더 키우듯 건사했다. 절에 갈 때면 단어 외우기 숙제를 내놓고, 돌아오면 체크를 했다. 그 다음엔 일기를 쓰도록 권유했다. 결혼한 해인 2004년에는 다문화센터가 없었지만 어머니는 여성회관 할머니한글교실로 데려가 한글을 빨리 깨우치도록 배려했다. 윙테이홍상의 배움은 빨랐다.
2006년부터는 결혼이민자 대상 프로그램이 앞다퉈 생겨, 성서종합사회복지관의 한국어 및 일상생활 적응교육, 독서대학, 영남대학교의 다문화가족 리더스쿨, 검찰청 통·번역 인력 양성과정 등 모든 교육을 수료할 수 있었다. 독서경진대회에서 다독상을 받을 정도로 공부에 맛을 들였다.
그 배움은 활동으로 이어져 대구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통·번역 등을 한다. 지난 8월 둘째 주간에도 이중언어 강사 시험을 보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교육받았다. 한국어 능력시험에 패스한 사람만 자격이 주어지는 시험이다. 여성가족부에서 엄마의 모국 문화를 자녀가 이해해 갈등을 줄이도록 엄마의 언어를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 둘 다 봐주시고 시간 주셔서 공부할 수 있어요.”
그도 아는 걸까. 며느리가 대학교까지 갔으면 하고 바라는 어머니의 속마음을. 시아버지가 심장병을 앓는 바람에 살림이 어려워졌다. 아들 형제만 둔 시어머니는 둘째아들 내외가 좋은 직장에 다니는 걸 보면 맏며느리도 더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문화 선생님을 계속 하고 싶어요. 한국에 사는 게 힘든 점도 많지만 공부하는 게 좋고, 또 모르는 걸 알려주시는 교수님들이 너무 좋아요. 한국정치, 문화 등을 배우며 배운 지식을 내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어 행복하죠” 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사랑과 열정의 샘물인 두 아들
그는 지금도 선생님이다. 살림에 보탬이 되도록 달서구청에서 운영하는 희망근로를 하면서 월 85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설문조사도 하고, 초기 결혼이민자의 한국생활 적응을 도우며, 다문화교육을 보조한다. 어린이집이나 고등학교에서는 베트남을 소개하는 다문화강사를 한다. 달서다문화가족도서관 설치 때도 실질적으로 다문화가정에 도움이 되도록 정보를 적극 제공하고 매일 출근해 이용방법을 안내했다.
자원봉사단체인 레인보우패밀리 봉사단원으로 다문화축제 때는 베트남을 소개하고 노인급식도 돕는다. 또 주말에는 이마트에서 번역 및 매장 정리를 돕는 아르바이트도 한다.
“근데 아기가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고 하네, 우는 게 한 달이 넘었어.”
10분 거리에 사는 베트남 여성 보티베티(26) 씨가 놀러와 상의한다. 한국말이 아직 많이 서투르다. “괜찮아. 우리 큰애도 많이 울었어. 자꾸 달래서 보내도록 해” 하며 안심을 시키는 그. 근처 친구 상담만이 아니다. 법원에 들어가고, 범법자들을 만나 통역하고 상담한다. 법 공부도 자연히 하게 된다. 달서구에만 베트남인 결혼자와 노동자가 700명 정도 있다고 한다.
어느 틈에 둘째아들 경호(3)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와 한바탕 소란한 즐거움이 지나가더니, 학원 갔던 큰 아들 정호(5)도 돌아오나 보다. 할머니도 뛰어나가고 며느리도 들썩인다. 정호는 씩씩해 보인다.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은 그 열정을 만들어주는 두 아들. 아이들이 조잘거리며 사랑 받는 표시를 낸다. 큰아들이 다가오더니 살짝 귀띔을 한다.
“아들, 수박씨 먹었어요. 물고기도 잡았어요.”
아이는 베트남 갔을 때의 추억을 얘기하고 있다. 분위기를 벌써 알아차렸나 보다. 베트남 얘기 중이라는 걸. 이중언어 강사를 꿈꾸는 엄마와 헌신적인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크는 아이. 베트남 추억을 얘기하는 아이는 싱글벙글이다.
모든 것을 내 것으로 껴안은, 작지만 큰 여성 윙테이홍상. 그의 서글서글한 웃음소리는 고향 속장의 행복한 어린 시절이 그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에게 준 선물이다.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