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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세상 울분이 작품의 힘 정재숙



온 집안이 작품 천지다. 서울 평창동 언덕배기, 김구림(71) 씨의 화실을 찾았을 때 발 디딜 틈 없이 작품이 빼곡한 그곳은 이미 살아있는 미술관으로 화하고 있었다. 미술품이 돈으로 재빠르게 환산되는 이 시대에, 그래서 이른바 ‘잘 팔리는’ 화가의 집에는 작품을 기다리는 화상이 줄을 서 있다는 이 시절에도 그는 의연하게 작품을 쟁여놓고 ‘나물 먹고 물 마시며’ 노동자처럼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미술대학을 갓 나온 새파란 작가들도 물감 마를 새 없이 그림을 팔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잘 나가는 어떤 작가는 시간이 부족하니까 사람을 사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만 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옵니다. 그건 아니죠. 그럼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죠. 붕어빵 찍듯 틀에서 찍어낸 미술품은 이미 공예품으로 스스로 전락한 겁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길 포기하고 쌀을 좇아 나섰다면 이제 미술(美術)이라 하지 말고 미술(米術)로 써야죠.”

한국 미술계의 영원한 아웃사이더
그는 평생 독설가요 반항아로 살아왔다. 학맥이나 인맥에 기대지 않고, 남 눈치 보지 않고 홀로를 즐긴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바른 말 잘하는 그 천성 때문에 한때 한국 미술계의 ‘대부’로 일컬어지던 한 화가에게 린치를 당했다는 미술동네 야사가 전해져온다.
“돈이면 다 된다는 무례가 지금 한국 미술을 망치고 있어요. 요즘도 뜸하게 화랑 주인들이 찾아와 뭐라는 줄 아십니까. ‘선생님, 그 70년대 작품, 그거 주세요’ 합니다. 30년 전 생산된 공산품을 내놓으라는 식이죠. 요즘 신문에 난 전시 기사 보세요. 미술기사가 아니라 경제기사에요. 뭘 어떻게 그렸느냐보다는 얼마에 팔리고 어떻게 투자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안내만 하고 있어요. 예술혼은 엿 바꿔먹었습니까. 다들 미쳤어요. 굶어 죽어도 난 그 짓 못합니다.”
살림집을 겸한 작업실이 미술관으로 변한 이유다. 비가 새서 얼룩덜룩한 벽은 장미 덩굴을 그려 한 폭의 벽화로 만들었다. 물이 떨어지는 화장실 천장은 설치미술처럼 보이는 관을 연결해 수리했다. 집안 곳곳이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작품으로 뒤덮여있다. 가족사진을 이리저리 오려 꼴라주한 뒤 물감으로 마무리한 액자 속에서 작가는 부인보다 작은 모습으로 웃고 있다. “어려운 생활인데도 묵묵히 내조해준 마누라가 나보다 더 큰 사람이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전위예술로 한국 사회를 뒤흔들다
지금도 ‘김구림’ 하면 1970년 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한강 뚝방의 잡초밭을 태워 기하학 모양으로 만든 뒤 자연과 인공의 어울림, 창조와 소멸의 의미를 물은 이 작품은 한국 대지미술의 첫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때가 참 답답한 시절 아니었습니까. 사방팔방 꽉 막힌 우리 신세를 뛰쳐나가 외치고 싶은 마음이 다양한 행위미술로 터져 나온 거지요. 누군가 그랬다지요. 작가의 역할은 ‘탄광 막장의 카나리아 새’라고. 70년대 한국의 젊은 미술가들은 그걸 했어요. 아니, 하려고 노력했어요. 지금 젊은 작가들은 그런 패기가 없어요. 난 아직도 울분으로 작품을 해요. 시류에 민감하고, 어떻게 흉내를 내야 잘 팔릴까만 신경 쓴다면 그게 무슨 예술가입니까.”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8월 24일~10월 28일)에 가면 김구림 씨가 70년대 한국 사회에 던졌던 분노의 목소리를 짐작해볼 수 있다. 1969년 창립한 ‘한국 아방가르드협회(AG)’의 창립회원이었던 그는 이듬해 연 창립전에서도 화제를 몰고 다녔다. 커다란 플라스틱 쟁반 세 개에 얼음을 얹고 그 위에 또 종이 하나씩을 얹어 놓는다든가, 육교에 풍선을 띄우고, 행인들에게 콘돔을 나눠주며 막힌 사회를 통렬하게 비난했던 그 에너지가 칠순인 지금도 여전하다. 이런 해프닝으로 여러 차례 뉴스 메이커가 됐던 그는 “예술은 예술 이전에 생의 상태다”라고 말했다.



쌀을 좇는 다면 미술(美術)이 아니라 미술(米術)
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미술평론가를 70년대 초 일본 도쿄의 한 전시장에서 만났다. 그가 쉰 가까운 나이에 미국에 건너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판화를 공부하며 어렵게 작업할 때였어요. 개인전을 여는 데 뭔가 획기적인 걸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상생활에 쓰이는 삽이나 빗자루 같은 공산품을 사다가 새 걸 마치 오래 쓴 것처럼 깨고 문질러 전시했어요. 나로서는 시간성의 문제를 미술에 도입한거죠. 그런데 전시 마지막 날 한 평론가가 오더니 질문을 하나 던져요. 당신이 지금 일상 사물을 과거로 돌려놨는데 만약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실제 사물과 당신 작품이 나란히 있으면 무엇으로 당신의 작품임을 증명하겠느냐는 거예요. 뒤통수를 맞은 듯 아득했죠.”
그는 “내 이름 서명이 들어있는 게 작품 아니냐”고 궁색한 변명을 하고는 돌아섰지만, 몇 날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 채 고민했다. 그때 번쩍 큰 생각 하나가 왔다. 김구림 씨는 몇 달 뒤 다시 개인전을 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번에는 사온 물건에 붓질을 해서 해묵은 물품처럼 만들어 전시했죠. 멀리서 보면 낡은 물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다가면 붓놀림이 보이게 했어요. 다시 그 평론가를 만났더니 술 한 잔을 사겠다고 하더군요. 설마 그 문제를 이렇게 해결할 줄 몰랐다며 얼른 짐을 싸서 귀국하거나 뉴욕으로 가라는 거예요. 일본에서는 외국인 작가의 능력을 어느 선까지만 인정해주니 더 넓은 무대로 나가 맘껏 펼쳐보라는 거죠.”
그는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15년을 구르며 오로지 작업, 또 작업으로 나날을 보냈다.
“컬렉터가 찾는 작품만 똑같이 하는 걸 나는 ‘발주 예술’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지조가 있어야죠. 지금 미술품 시장은 증권시장하고 똑같아요. 오르는 종목에만 투자자가 몰려들거든. 그럼 한국 미술은 끝장이요.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가 끓어올라요. 어떻게 어제 한 걸 또 그리고 앉아 있을까, 궁금하다니까요.”

※ 김구림은 일흔이 넘은 지금도 ‘만년 청년’을 외치는 미술계의 영원한 프론티어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그는 ‘개척’ 또는 ‘전위’란 단어에 걸맞은 길을 걸어왔다. 대지미술, 행위예술 같은 새로운 사조의 맨 앞에 서 있었던 작가, 판화나 설치미술 등의 새 형식 실험에 주저함이 없었던 작가다.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나 별 학맥 없이 거의 독학으로 일본과 미국 등 현대미술의 전방위를 헤집고 다녔다. 2006년 ‘이인성 미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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