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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향기가 안내하는 세상 갯벌에 푹 빠진 아이들 박미경




갯바람에 그을린 얼굴 위로 햇살 같은 미소가 환하다. 많은 추억을 나눠 가진 외삼촌처럼, 여러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작은아빠처럼,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아이들을 마중 나온 함민복 시인. 이쪽을 향해 환영의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은 물때를 시계 삼고 갯벌을 젖줄 삼아 살아가는, 더도 덜도 아닌 딱 ‘이 동네사람’이다. 그가 강화군 동막리의 버려진 농가에 둥지를 튼 지 올해로 11년. 오늘 만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인솔선생님이 아무리 설명해줘도, 섬사람의 피부와 뱃사람의 말투를 닮아버린 그를 송암동산의 14명 아이들은 그냥 ‘아저씨’라 부른다. 

아저씨, 이게 뭐예요?
한낮, 동막해수욕장의 물은 먼 곳으로 나가고 없다. 수평선을 지평선으로 바꾼 채 끝없이 펼쳐진 갯벌. 아이들은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뛰어들 태세지만, ‘아저씨’는 어딘가로 자꾸만 걸어가고 있다. 도시인들의 잦은 방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동막해수욕장. 시인이 인도하는 곳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 드문 갯벌이다.
앞 다투어 신발을 벗고, 녀석들이 하나둘 안으로 들어간다. “흙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나.” 발가락 사이로 미끈거리며 삐져나오는 진흙의 감촉이 성용이(11)는 못내 신기한 모양이다. ‘소똥을 밟는 기분’이란 말을 덧붙이면서도 아이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힘을 빼고 걸으면 좀 쉬워.” 발이 푹푹 빠져 쉬이 걷지 못하는 선아(13)에게 몸 날랜 진혁이(11)가 한 수 가르쳐준다. 그 말이 도움이 됐던 걸까,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던 선아가 그새 저만치 나아가 있다.
청진이(11)와 병민이(12), 정호(13)는 벌써 게 한 마리씩을 잡아와, 자신이 잡은 게의 이름을 시인에게 묻는다. “옆으로 걸어가는 건 칠게, 앞으로 걸어가는 건 밤게.” 강화살이 10여 년에 ‘반어부’가 돼버린 시인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한다. “아저씨가 가지실래요?” 한 녀석이 칠게를 내밀며 묻자, 이번에도 시인은 곧바로 답을 돌려준다. “아니, 살려줘야지.” 당연한 걸 깜빡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아이들.     
“아저씨. 이 풀 이름이 뭐예요?” 갯벌 가득 돋아난 풀들을 보며 연희(11)가 묻는다. “나문재라는 풀이야. ‘나 문제야’ 하고 외우면 쉽지. 뻘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환경지표식물인데, 나마자기라고 부르기도 해. 짠맛이 나는 풀이라서 염초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직은 잎이 파랗지만 가을이 깊어지면 색깔이 무지개처럼 변할 거야. 그래서 칠색초라고도 부르지. 옛날 먹을 게 없던 시절엔 반찬으로 이 풀을 많이 먹었대. 상에 만날 남아서 나문재가 됐다는 얘기도 있어.”
풀이름을 궁금해 했던 연희는 그 사이, 작품 하나를 완성해 놨다. 뻘흙이 고스란히 묻은 탓일까, 주워온 병에 나문재 한 다발을 꽂았을 뿐인데 제법 그럴싸한 예술작품이 됐다. 붉은 노을과 무지개빛 나문재가 한 몸으로 뒤섞일 가을저녁. 그 때 다시 이곳에 온다면, 이 녀석은 또 어떤 작품으로 오늘을 기념할까.



맨발로 지구를 신고
미끄러운 갯벌 안에서 엉덩방아는 기본. 한두 번 자빠지고 난 뒤로, 옷을 버릴까 조심하는 아이는 이제 없다. 비에 이미 젖은 자가 다시 젖을 것을 두려워 않듯, 옷을 이미 버린 아이들은 다시 버릴 것을 염려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어 있다. 가만…. 시인의 시 <숭어 한 지게 짊어지고>에 나오는 표현처럼, 갯벌에 서 있는 아이들은 모두 ‘맨발로 지구를 신고’ 있다. 무려 천팔백만 평, 여의도의 이십 배나 되는 갯벌 밭을 신발로 신고 있는 아이들. 서로의 팔과 다리에 진흙 팩을 발라주며 노는 계집아이들도, 말아 쥔 주먹에 뻘흙을 씌워놓고 권투선수 흉내를 내는 사내아이들도 ‘지구를 신은 채’ 웃고 있다.
“바닷물을 움직이는 것은 달이야. 달이 물을 끌어당기고 놓기를 반복하지. 오늘은 물이 아주 많이 들어오는 날이야. 물 들어오는 시간은 매일 1시간씩 변하는데, 오늘 5시에 물이 들어오면 내일은 6시에 들어오지. 무엇보다 갯벌은 아주 깨끗한 거라는 걸 잊지 마. 오염된 물을 정화시키는 게 바로 갯벌이란 걸.”
시인의 이야기를 뚫고 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 쪽으로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간다. 집게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비행기가 물고기처럼 생기지 않았냐고 시인이 묻는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던 아이들의 얼굴에 이내 수긍의 빛이 돈다. 남들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인의 ‘다르게 보기 바이러스’가 아이들의 몸으로 옮겨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저씨. 비행기엔 모두 몇 사람이 탈 수 있어요?” “글쎄. 아저씨는 아직 비행기를 안 타봐서 모르겠는데.” “그럼 배는요?” “그건 많이 타봤지. 새우를 잡기 위해 한 달이나 배에 탄 적도 있는걸.”
비행기에서 배로 화제가 옮겨가자, 시인이 아이처럼 어깨를 으쓱한다. 마치, 먼 세상이 궁금한 조카와 고기잡이 삼촌의 대화 같다. 눈치 없는 괭이갈매기가 시인과 아이들의 ‘천진한 대화’를 깨며 때마침 날아간다. “흰 갈매기는 늙은 거고, 재갈매기는 어린 놈이야.”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뭐든 알려주고 싶어 하는 시인이, 끊긴 대화를 다시 이어간다. 

오늘은 미래의 추억
여길 먼저 왔어야 했을까. 뻘흙 묻은 옷을 새것으로 갈아입고, 한달음에 달려온 강화갯벌센터. 이곳에서 맨 처음 마주하는 건,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멸종위기 새들과 해양생명체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물이다. 화면을 숨죽이며 바라보던 아이들의 얼굴에, 갯벌에서 마음껏 ‘뛰어논’ 것을 후회하는 빛이 역력하다. 돌연 진지해진 아이들이 입체만화경과 망원경으로 귀한 생명체를 들여다보거나, 비치해둔 책을 꺼내 방금 전 갯벌에서 만난 생명들에 대한 자료를 찬찬히 더듬는다. 한층 깊어진 눈빛. 이제 아이들에게 갯벌은 ‘사람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생명들의 터전’임에 틀림없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다 추억이 되겠지요?” 센터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 내내 조용히 걷던 준경이(13)가 애어른처럼 한 마디 한다. ‘그럼. 오늘은 모두 미래의 추억인 걸.’ 답을 해주려고 고개 돌리니, 아이는 그새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바닷물이, 아이 대신 고개를 끄덕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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