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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마음 비우고 떠나는 낙엽처럼 한승원



낮이면 하늘에 숨어 있는 별이나, 숲속의 음음한 그림자나, 불어오는 바람이나, 밤하늘을 밝히는 달이나, 흐르는 구름처럼 먼발치에서 나를 지켜보곤 하시는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이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데, 곡성 산골에서 배 과수원을 하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바야흐로‘황금’이라는 배를 수확하면서 내 생각이 나 내 전화번호를 눌렀다는 것입니다.
“어이, 해산, ‘추사(장편 역사소설)’ 내놓고 건강 괜찮으신가? 젊은 사람들도 못하는 일을 그렇게…”
나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다 수출해버리지 말고 나 묵을 것도 좀 남겨놓소.”
낮이면 하늘에 숨어 있는 별이나, 숲속의 음음한 그림자나, 불어오는 바람이나, 밤하늘을 밝히는 달이나, 흐르는 구름처럼 먼발치에서 나를 지켜보곤 하시는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친구의 전화를 받고 보니 수확의 계절입니다.
내 인생의 계절은 시방 어느 계절입니까, 겨울을 눈앞에 두고 있는 늦은 가을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수확해야 합니까. 나는 바쁩니다. 겨울이 돌아오기 전에 들판에 널려 있는 것들을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건강을 조심해야 하고, 가을 전어를 먹어 살찌워야 하고, 더욱 부지런히 서둘러야 합니다.
가을에는, 자기의 수확을 위하여, 할 일을 다 한 낙엽들은 이제 마음 비우고 떠나가야 합니다. 귀뚜라미들이 그들을 위하여 축하합니다. 하늘은 맑고 황달이 드는 풀잎에 영롱한 이슬이 맺힙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무지막지하게 길고 무더웠습니다. 과연 이 여름이 끝나기는 끝날까, 시원한 가을이 오기나 할까, 가을과 겨울이 실종되고 영원히 여름만 계속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냉방 해놓고 잠들기 싫어 창문을 모두 열어놓은 채 잠을 청하면, 뒤란의 죽로차 밭과 마당 가장자리의 호두나무와 감나무에서는 쓰르라미들이 여름밤을 떠들썩하게 찬양했습니다.
달도 우중충하게 물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부터인가 갑자기 추워졌고 이불을 덮고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아, 가을입니다. 세월은 멈춰있지 않습니다. 흐르고 또 흐릅니다. 이제 쑥부쟁이들이 피고, 국화꽃들이 피기 시작합니다. 나는 산기슭에 피어난 황금색의 쑥국화 꽃잎에 코를 대고 킁킁 향기를 밭습니다. 향기 속에 몸을 맡기면 내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짙푸른 하늘을 떠도는 혼령이 됩니다. 차나무에는 앙증스러운 열매들이 달려있습니다. 동시에 꽃망울들이 맺히고 있습니다. 차나무는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히는 나무입니다.
나의 삶은 무엇인가.
며칠 전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의 ‘추사’ 사인 판매 행사에 갔다가 경기도 산본의 한 아파트에 사는 손자들과 더불어 즐기고 왔습니다.
작가는 모든 것을 작품으로써 이야기합니다. 알을 낳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암탉이 알을 낳는 일을 존재 의미로 삼듯이 작가의 존재 이유는 작품 써내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있어서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은 고마운 후원자입니다. 시쳇말로 ‘빽’입니다. 나는 책을 사들고 온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진정으로 예쁘게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늙은이인 내가 낙엽이라면 손자는 새싹이고 새 가지입니다. 내 성 ‘한’씨를 쓸 뿐 아니라 내가 사라지고 없는 세상을 자리매김할 존재입니다. 손자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나는 늘 너털거렸습니다.
서울에서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내 마당 풀밭에는 늙은 감나무에서 떨어진 시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다산성인 늙은 감나무는 봄에 주렁주렁 매단 자기의 열매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름부터 시자를 흘려놓곤 했습니다. 초가을 들어서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나는 그것들을 주워 감나무 뿌리에도 놓고 철쭉나무 뿌리에도 놓았습니다. 썩어 거름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돌고 돕니다. 잎과 시자가 썩어 나무의 거름이 되고 잎이 되고 꽃이 되고 열매가 될 터입니다. 그 일을 하는데 허리가 아팠습니다. 내 몸도 많이 낡아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세월 앞에서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낮이면 하늘에 숨어 있는 별이나, 숲속의 음음한 그림자나, 불어오는 바람이나, 밤하늘을 밝히는 달이나, 흐르는 구름처럼 먼발치에서 나를 지켜보곤 하시는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나의 몸도 언젠가는 썩어 세상의 거름이 되고 내 넋은 잎과 줄기와 꽃으로 피어나고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시방의 나 살아가는 것은, 좀 더 확실한 잎과 꽃이 되고 열매가 되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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