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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숨은 예인 춤추는 바람꽃, 나금추 진옥섭

1995년, <여성농악단>이라는 공연을 앞두고 고민했었다. 보도자료엔 “아직도 그 유랑을 헐값으로 손님을 끌던 ‘나이롱극장’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포장걸립’이었고, 그 비 새는 포장극장 속에서 실팍한 예술이 숨 쉬었으니 마지막 유랑단체 여성농악단, 분명코 가무악의 최고 전사다”라고 당당히 썼었다. 그런데 극장에 온 그녀들은 방금 배추 소금에 절여 놓고 나온 아줌마들이었다. 불현듯 여성이 풍물을 치면 얼마나 칠까, 덜컥 겁이 났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여성이라는 편견에 얼얼하게 따귀를 올려붙이는 음악이었다. 마치 공이 울리면 곧바로 뛰어나가는 복서처럼, 무대가 밝아지자마자 “덩!”을 찍어 넣으며 순식간에 질주하였다. 솔직히, 여성이니까, 링 위에서 걷어붙이고 걷는 라운드 걸처럼, 관음증을 자극하는 정도였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세상에 저토록 사나운 음악이 있었던가, 정말 바람의 파이터였다. 맹공을 퍼붓는 인파이터, 그날의 음악은 지금도 아찔하다.

지난해 6월, 전주에 있는 소리문화의 전당에서 <천하의 상쇠 나금추> 공연이 있었다. 여성농악단의 첫 상쇠요, 여성농악의 상징인 사람. 공연을 시작하자마자 장내를 손아귀로 꽉 쥐듯 압도했다. 다시금 마디가 굵은 음악의 뼈를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음악에 두둥실 춤을 출 때, ‘예술’이란 치장보다 ‘밥’에 단순한 몰두가 이룬 순수한 힘을 느꼈다. 문득 ‘헝그리 정신’이란 말이 생각났다.

산딸기 이슬을 털던 유랑
“금추가 아니라 모녀였어.” 나금추(羅錦秋)는 1938년 전남 강진에서 팔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라고 ‘막녀’였는데, 호적에 올릴 때 똑똑한 면서기가 모녀(模女)로 고쳐 올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광주에 있던 둘째 언니집에 얹혀서 살았다. 1953년 수피아여중 1학년 때 포장을 치고 공연하는 <임방울과 그 일행>, <임춘앵 국극단>을 보고 멍해졌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몰래 광주국악원에 입학했다. 판소리 명창 정광수에게 단가와 토막소리를 배우고, 명무 한진옥에게 승무를 배웠다. 점점 무대의 꿈이 영글어 갈 때, 향교를 지키는 어른이 ‘모녀’로는 그 길이 힘들다고 ‘금추’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학교 빼먹고 ‘광대 짓거리’ 배우러 다닌다고 등 푸른 생선이 될 때까지 맞았다. 그러나 운명은 제 갈 길을 속삭였다. 1954년 열일곱에 집의 돈을 훔쳐 야반도주해 남원 국악원에 들어가 강도근과 김영훈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다음해 남원에서는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농악경연대회를 겨냥하고 농악연습을 하였다. 꽹과리에 장홍도, 김문선, 강초은, 장구에 오갑순 등이 연습하고 있었다. 징을 들고 따라 나선 <남원농악단>이 서울대회에서 1등을 하자 1956년에 여성으로만 구성된 <춘향여성농악단>이 만들어졌다. 나금추가 상쇠, 오갑순은 상장구, 그리고 모든 단원을 여성으로 구성했다.

그저 ‘여자들끼리만 해보면 어떨까’하는 우연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금세 흥행의 코드가 되었다. 흥행의 선두였던 여성국극이 과도한 제작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울고 있는데, 농악기만 들고 면면촌촌을 기민히 이동하여 밥을 버는 틈새시장을 개척한 것이다. 보릿고개란 말이 시퍼렇던 시절. 밥만 먹여주면 죽기 살기로 따라나서는 소녀들이 있었기에 앞 다퉈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봄이 오면 구례의 곡우제를 시작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진해 군항제, 남원 춘향제, 강릉 단오제, 부여 백제예술제, 밀양 아랑제, 경주 신라문화제, 진주 개천예술제, 갈봄 여름 없이 포장을 치고 농악을 울리는 축제의 나그네였다. 그리고 축제와 축제의 사이에는 인근의 대읍과 소읍, 면단위의 큰 마을 까지 들어갔다. 대개는 타작마당이나 큰 공터가 있었고 대대로 포장걸립이나 잔치를 벌이던 곳이었다. 손님이 몰리면 하루 3회, 5회, 10회를 공연한 적도 있었다. 손의 꽹과리가 저절로 익어버렸고, 토막창극을 하느라 배운 소리 또한 만좌중을 흔들었다.

1959년, 점차 남녘에 상쇠 나금추가 이름이 번지던 때, 미국공연을 위해 서울 비원에서 합숙하였다. 시민문화회관에서 시연만 하고 미국 공연이 무산되어 해체되지만, 이때의 학습이 예술의 기둥이 되었다. 당시 남성들의 농악은 특별히 설 곳이 없었다. 그런데 여성들의 농악이 히트하면서 여러 단체들이 만들어지고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남성 명인들의 예능을 전수한 것이다. 비원 합숙에서 상쇠 김재옥에게 꽹과리와 부포놀이를, 정읍의 김병섭에게 장구를 사사했으니 최고의 예능을 사사한 것이다.

스물세 살에 국악 동호인 장금동과 혼인하여 3년 정도 쉬다 다시 판에 나와 전국을 떠돌았고, 당시로서는 유례없이 큰 일이었던 오사카엑스포 공연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점차 흥행이 시들해졌다. 차범근 선수가 골을 넣고 김일 선수가 박치기를 하면서 보급된 텔레비전, 손님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지방 극장들의 텃세, 그간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단체끼리의 다툼, 결국 포장을 싣고 황톳길을 돌아다니던 ‘도라꾸’들이 하나 둘 멈추기 시작했다. 서른셋에 충북 보은에서 장마철을 맞아 흥행에 참패하고 단체가 해산되자 집으로 물러앉았다.

그러나 예술에서는 물러나지 않았다. 1983년 제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 장원을 하였고, 그해 11월 국립극장의 <한국명무전>에 출연하여 상쇠춤을 공연하였으니 소리판과 춤판을 휘어잡은 것이다. 또 198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이리농악단의 상쇠로 출전하여 대통령상과 개인연기상을 수상하였고, 1987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부안농악의 상쇠로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최고의 현역 상쇠
지난 11월 24일 <상쇠>라는 제목으로 나금추의 공연을 하였다. 솔직히, 아무리 한때를 주름잡았더라도 73세인데, 하는 생각이 있었다. 날벼락처럼 작열하는 장구 소리 위에 꽃 한 송이 피어올랐다. 상쇠 나금추의 머리에 핀 부포꽃이었다. 날짐승의 흰 깃털을 모아 둥그렇게 붙인 꽃이다. 공기의 밀도도 벽인지라 앞으로 밀면 활짝 펴지고 뒤로 당기면 다물어지는데, 이 단순한 원리가 아찔하고 현란한 꽃을 피웠다. 그리고 징, 장구, 소고들을 이끌고 일사분란하게 원을 만들었다.

좌회전과 우회전 그리고 유턴을 몇 차례 반복하며 속도를 부가하다 갑자기 꽹과리 장구가 원안으로 들어가 돌았다. 바깥의 소고꾼들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크게 돌며 공중회전인 ‘자반뒤지기’를 했다. 안에는 불꽃 튀는 가락이 번지고 밖에서는 바람 같은 회전을 했다. 한순간 회오리바람처럼 감기는 ‘굿이 핀다’고 이야기하는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마치 양철통을 돌던 설탕가루들이 갑자기 솜사탕으로 활짝 번져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 회오리바람의 중간에 또다시 피어오르는 부포꽃. 자신이 연주한 후끈한 쇠가락에 저절로 둥실 뜬 꽃을 쩍! 쩍! 전후좌우로 찍어댔다. 마치 조롱을 열고 나온 새처럼 그렇게 날개를 탁! 탁! 치며 춤 속으로 들어갔다. 보릿고개 언덕을 넘어 고봉밥을 찾아가던 동안 터득된 굳은 살이 박힌 춤이었다. 나금추, 우리시대의 최고령 상쇠지만, 분명 최고의 현역 상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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