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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명으로 다시 새싹은 움트고 그렇게 생명이라 홍승스님

다시 생명을 놓아주라
봄은 바야흐로 생명이 싹트는 계절이라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겨우내 잠들어 있던 나무에서 다시 새싹이 움트고 얼어붙어 있던 땅에서 생명이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더불어 움츠러들어 있던 우리들의 마음도 괜시리 들뜨고 새로운 희망에 부푼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 돌아가는 모양은 그리 희망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불교적 사고로 볼 때 생명이라는 단어와 연관되어지는 행위는 ‘방생’이다. 방생은 놓을 방(放), 날 생(生), 생명을 놓아준다는 뜻이다. 즉 죽게 된 생명을 구해서 살려주는 운동이며, 비록 미물들일지라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 죽이지 않고 보호하는 의식이다. 작게는 사람의 손에 걸려 죽게 된 고기나 새 등을 사서 제 살던 곳으로 다시 놓아주는 것을 말하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불교인의 첫번째 계율인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뭇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말한다.

나와 타인이 함께 행복한 길로
우리 사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웃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부와 권력을 빼앗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저마다 이 구조 속에서 서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서고자 경쟁하고 부딪치면서 다른 사람들을 냉혹하게 피라미드의 하부로 밀어뜨리고 있다. 이는 너나없이 보다 많이 소유해야만 삶의 안락이 보장되리라는 탐욕적 가치에 중독된 채 그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나와 타인이 함께 평등성을 실현하기 위한 무소유의 가치가 있다. 이 무소유의 가치에 입각하여 우리들의 현실적 삶에 구체적 가치 기준을 설정한 것이 다름 아닌 불교의 계율이다. 피라미드 구조 속에 갇혀 전도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나와 타인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구체적 가치 기준인 것이다.
이 계율의 첫번째 항목이 ‘불살생’, 즉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이다. 불교의 불살생계에는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나타나 있다. 생명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그 자체가 그대로 목적이다. 생명의 존엄성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존엄성이란 이 세상에서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다. 따라서 그 어떤 이유로도 생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차별받거나, 핍박이나 억압을 받아서는 안 된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첫마디의 말씀에서도 생명의 존엄성을 함축적으로 선언하셨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생명의 본성만이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생명이 불교의 가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이며 근본이 되는 것은 불자들의 삶의 가치 기준이 불살생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즉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해치고 생명을 구속하거나 차별하는 모든 것을 깨트림으로서 생명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불살생계의 참 뜻인 것이다.

처음의 참뜻으로 다시 돌아가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살생계의 구체적 실천 행위인 방생이 언제부터인가 그 참 뜻을 잃어가고 있다. 단지 기복 행위만을 위한 요식 행위로 변화한 채 심지어는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수입 어종을 방생함으로써 토착 어종의 멸종을 초래하고, 수입 물고기를 방생하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물고기들이 죽음으로써 생명을 살리려고 시작한 방생이 오히려 살생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연기법을 모르는 데서 출발한다. 연기법은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상의 상관 관계에 있다는 불교적 세계관이다. 즉 우주만물이 나를 지탱해 주는 존재이기에 어느 것 하나라도 파괴되기 시작한다면 나의 존재도 파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결국 불교계에서 의례적으로 하는 방생 법회가 결과적으로는 나와 남의 존재를 파괴하는 원(原)이 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요즘 들어 방생의 폐해나 문제점에 대한 불교계 내부의 반성 속에서 방생 문화에 대한 인식들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방생을 물고기나 날짐승의 목숨을 살려주는 행위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존엄을 실천하는 출발점이며 자비의 구체적 실천행이라는 처음의 참뜻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인식들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방생 문화를 바꿔보자. 단순히 새나 물고기를 놓아주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 인권, 생명을 살리는 활동 등 방생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살리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한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인간 상호간에 부조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방생이며, 그 중에서도 으뜸이 인간 생명을 위한 방생이기 때문이다. 생명 존중사상만이 이 삭막한 현실을 다시 따뜻하고 희망찬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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