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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 김형석

한 달쯤 전이었을까. 시골 밤길을 거닐다가, 개구리 소리를 들었다. 참 오래간만이었다. 고향에 있을 때는 해마다 들으면서 밤을 지새우던 소리다.

여름이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뒷산에 올랐다가 매미들이 짖어대는 소리에 약간 놀랐다. 매미는 가을을 예고해주는 합창을 한다. 곧 가을이 올 것이라는 소식에 접하는 것 같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빼앗기고 떠난 고향 생각이 떠오른다. 동물들은 저녁때가 되면 귀소심에 사로잡힌다. 나도 나이 든 때문일까, 최근에는 60여 년 전에 떠난 뒤 가보지 못한 북녘 땅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확실히 나는 실향민이다. 고향과 더불어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나를 키워준 자연을 잃었다. 내 고향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촌이었다. 자연이 내 삶을 키워준 어머니와 같았다. 그런 고향을 떠난 뒤부터는 계속 도회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기계 문명이 내 생활을 편하게 해주었으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정서적인 풍요로움은 모두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현대인들은 그 많은 시간을 컴퓨터에 바치고 있으면서도 하늘과 숲은 보지 못하고 산다. 바람소리를 들어보는 어린이도 없는가 하면 별들과 속삭여보는 젊은층들도 없다.

자연을 잃으면 인생의 터전을 상실하게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고향을 떠난 후부터는 나 홀로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의 사귐은 부담스럽지 않으나, 언제나 직장의 동료들, 주변의 사회인들과의 접촉은 생활의 필수여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잠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만남과 사귐의 관계가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해 버렸다. 사회인으로 성장했다는 좋은 평가일지도 모르며 혹은 성공한 사람 모두가 그렇다는 긍정적 해석이 될 수도 있겠다.

세상이 다양해지다 보니까, 직장 이외에도 어떤 소속단체가 없으면 허전함과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스스로를 어떤 조직과 집단의 일원으로 삼아 안정감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 조직체가 아니면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축소되는 듯 소외의식 같은 것을 갖게도 된다.

그러는 동안에 현대인들은 자아의식이 약해졌고 심하게 되면 나의 나됨, 즉 자아성을 상실하기도 한다. 군중 속을 걸어 다니는 고독한 자아로 살아가기도 한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자유로운 지성인으로 살고 싶었다.  고향에서 얻은 하나의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러나 나 홀로의 시간이 줄어들면서 나의 나됨을 잃어가고 있는 듯싶어 서글퍼진다.  많은 군중 속의 한 사람인 나는 있으나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개구리 소리와 매미들의 합창을 들으면서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은 이렇게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심에 젖어든 까닭인지도 모른다.  금년 가을에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장소는 같을 수 없으나 고향이 있을 듯싶은 산속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녹음이 우거지고 마음껏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고장에서 홀로의 시간을 가져보아야 하겠다.

옛날 고향에서와 같이, 몇 시간씩 파란 하늘에 그려졌다가 사라지곤 하는 구름들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구름은 천재라고 말했던 외국의 한 시인은 단명했던 병석의 많은 시간을 구름보기를 즐기는 일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가을 하늘이 언제나 새로운 화폭으로 꾸며주는 구름에서 어떤 잃어버린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는 없을까.

고향에서와 같이 밤이면 오래 오래 하늘의 별들을 살피다가 잠드는 밤이었으면 좋겠다. 내 친구였던 시인 동주는 별들의 속삭임을 마음으로 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나는 그렇게 잔잔한 마음의 수면(水面)은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꿈의 벗(友)이었던 별들을 마음껏 바라보고 싶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이 생기면 학창시절에 심취했던 고전읽기에 다시 한번 빠져들고 싶다.  읽다가는 사색에 잠기면서 산책을 하고, 아름답거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원고지에 기록도 해보는 여유로운 날들을 보내보고 싶다. 옛 사람들은 가을을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고 말했다. 독서와 사색은 뜻을 높여주며 마음의 양식을 채워주는 소중한 임무임에는 틀림이 없다. 금년 가을은 나를 되찾고 살찌게 하는 독서와 사색에 몰입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빼앗긴 고향에는 다시 갈 길이 막혀있으나 자연의 품에 안겨 잃어버렸던 나 스스로를 되찾아보는 나만의 시간이 있어야겠다.
그런 가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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