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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숨은 예인 춤추는 해어화, 장금도 진옥섭

전군가도의 벚꽃이 질 때 월명공원의 벚꽃이 핀다. 서해의 서늘한 바람에 군산의 꽃이 늦는 거다. 눈발처럼 흩날리는 벚꽃동산에서 할머니가 ‘저 쪽이요’ 하며 북쪽을 가리켰다. 70년 전 봄에는 파시처럼 가설 요릿집이 들어섰다 한다. 꽃다운 예기(藝妓)들이 가무를 벌였던 한 철의 요릿집, 이제 할머니의 기억에나 있다. 그 아래 채만식이 묘사한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버린 황해가 펼쳐져 있다.

나는 북쪽을 보다 할머니의 손끝에 시선을 모았다. 갑자기 할머니가 손을 내렸다. “괜히 기죽이지 맙시다.” 춤이란 게 맹랑하여 들여 놓기 어렵지만, 한번 스미면 애써도 감출 수 없다. 바로 할머니의 손끝이 그렇다. 그러나 아직도 불편한 과거여서 춤 이야기만 나오면 기가 죽는 거다. 명무라는 지칭도 ‘옛날 그 짓’을 들추는 달갑잖은 말일 뿐이다. 기강이 일본군대보다 더 심했다던 군산 소화권번, 그 마지막 예기의 손끝에서 ‘째보선창’, ‘미두장’, ‘콩나물고개’, 예전 군산이란 대처가 인화되고 있었다.

“먹고살라고 배웠소”
장금도(張錦桃)는 1928년 <탁류>가 흐르는 군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장이던 큰 오빠가 병들자 열두 살 봄 권번(券番)에 입적했다. “먹고 살라고 배웠소!” 어린 입에 백태가 끼도록 온종일 소리를 했고 발바닥이 갈라지게 춤을 추었다. 소리도 좋았으나 춤이 더 드러났다. 수줍어 말도 못하는데 춤추라면 벌떡 일어섰다. 사람들은 “신 내렸다”고 수군거렸지만, 춤추는 순간은 춤추는 시간 속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춤은 가장 은밀한 피신처요 유일한 쉴 짬이었다. 1943년 열 여섯 살에 권번 졸업시험을 쳐 종합 수석을 했다.
명월관이든, 천수각이든, 손님들은 너나없이 ‘춤추는 긴또(장금도의 창씨명)’를 호명했다. 동기(童妓)때 부터 춤으로 이름나 하루도 ‘공치는 일’ 없었다.

1945년 열여덟 봄에 정신대를 피하려 부여로 시집을 갔고, 해방이 되자 아이를 가진 채 다시 군산에 내려왔다. 남편의 살림으로는 식구들을 다 먹일 수 없었던 것이다. 키가 커서 임신을 했어도 태가 나지 않아 춤을 추었다. 아홉 달까지 춤을 추었고 해산하고 한 두 달 후에 곧바로 춤추었다.
소리꾼은 흔한데 춤꾼은 드문데다 소리와 춤 모두가 좋아 단 하루라도 집에 앉을 여가가 없었다. 요릿집에 가서도 잠깐 잠깐 이방 저 방을 옮겨 다녔다. ‘뽀이’들은 전화 왔다고 불러내 주었다. 그러면 얼른 나와 다른 방에 가서 춤을 추고, 뒤뜰에 가서 아기 젖을 물리고, 또 다른 방으로 춤추러 갔다. 방마다 장금도를 찾았기에 마루에서 ‘뽀이’들이 서로 당겨 소매가 찢어지기도 했다.

전쟁 후에는 권번이 국악원으로 불렸다. 시류가 변해 요정에서도 댄스 추는 여급을 선호했다. 그러나 김제 만경의 멋이 찬 한량들은 늘 장금도를 호명했다. 금강 변에서 화전놀이 벌어지면, 포구에 큰 배 들어오면, 내장산 단풍이 물들면, 잔치가 벌어졌다. 그 잔치가 잔치 소리를 들으려면 소리에 임방울, 춤에 장금도가 나와야 했다.
1955년 무렵, 하루는 열 살배기 아들이 싸우고 들어왔다. 친구 중 하나가 “니기 엄마 우리집서 춤췄다” 놀려댄 것이다. 이제 춤을 접을 때가 온 것 같았다. 창성동에 버젓한 큰 집을 사서 한해를 더 추었고 이듬해, 1956년 스물아홉에 춤을 접었다. 김제 만경에서 불러도 깊이 침묵하고 살았다. 일 년 쯤 지난 어느 날 시집간 여동생이 양장점을 데려갔다. 한복을 입으면 기생 태가 난다고 양장을 맞춰주었다. “그래서 쓰봉 입고 살아요.” 식구들을 밥 먹여온 지나간 시간들이 죄가 되었다.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모른다. 담을 쌓고 살았지만, 가끔 TV에서도 인간문화재가 된 선후배들을 봤다. 반가워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면 귀여운 손자들이 달려들어 채널을 돌렸다. 할머니도 국악을 아느냐며 싱글거리면 방에 가서 누웠다. 아들 손자가 모이면 화목한데, 국악 프로만 나오면 시끄러운 과거가 생각나 그렇게 홀로 돌아누웠다.

 

얼룩과 무늬
1998년, 서울세계무용축제 중 <명무 초청공연>을 꾸미는 중이었다. 채만식의 <탁류>의 시간을 인력거로 지난, 춤꾼이 있단 말을 듣고 지평선너머 군산을 향했다. 인력거 두 대를 보내야 춤추러 나왔다는 명성을 깊이 감추고 그저 ‘종기네 할머니’로 살았다.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가 춤 이야기를 꺼내자 “애기들 깬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 절레절레 내젓던 손, 힘 하나 안 들어가고 하늘거리는 그 손끝이 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에 올라섰을 때, 아! 참으로 그럴 수 없는 춤이었다. 
장단이 나왔고 조용히 손이 올라갔다. 수건을 들지 않은 빈손이라 오로지 소매와 손끝만이 드러났다. 선율을 한 올 한 올 세며 서서히 공기의 무른 곳으로 스며들어갔다. 공기의 밀도도 벽인지라 소매 속 선이 드러났고, 몇 발짝 뗄 땐 전신의 간결한 그림자가 그려졌다. 춤은 ‘드러냄’이 아니라 ‘드러남’이었다.
<살풀이춤>인데, 수건을 들지 않고 추는 춤이었다. 보통 장식 없는 것에 ‘민’자를 붙이듯 <민살풀이춤>이라 불렀다. 옛 춤꾼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며 모두 수건을 들며 점차 사라진 춤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이 ‘즉흥’이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순수하게 그 무대만의 것을 조성하는, 까마득히 잊혀진 기법 ‘즉흥’이었다. 오로지 펼쳐지는 선율에 적응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것인데, 매 순간 달라지는 무한한 무늬였다. 이 시대가 잃어버렸던 그 ‘무늬’가 장금도의 ‘얼룩’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간 더러 알음알음 배우기를 간청한 이들이 있었지만 가르쳐줄 게 없다. 음악에 따라 저절로 추는 즉흥인지라, 알려줄 수 있는 게 고작 “뱃속에 판소리 다섯 바탕이 있어야 된다”는 정도였다. 춤만 따로 추는 요즘에 말하나마나한 비결이다. 게다가 인간문화재라는 실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들 한발 물러났다. 2004년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2005년 <전무후무>, 2008년 <해어화, 장금도> 무대에 오를 때 마다 찾아왔지만 이내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벚꽃동산이 펼쳐진 월명공원, 봄이 간다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꽃잎이 어지럽게 천지에 흩어졌다. 일행들의 탄성이 일고, 한 모금 축인 술이 춤기운을 부추기는 통에 춤판이 급조되었다. 쑥스러워 입을 가리고 웃다 잠시 팔을 벌리는데, 어느새 무심한 표정으로 춤에 들어버린다. 어디서 시나위 선율이 흘러 나왔는지 늘어뜨린 손끝에서 벌써 춤이 뚝뚝 떨어졌다.
살아있어 눈앞에 펼쳐지는 춤이지만, 보고 있어도 이미 환영 같다. 배우려면 배울게 없는 신기루 같은 춤, 그래서 도무지 옮겨 담을 도리가 없는 춤, 발견되자마자 부스러져 망실되어 가는 유적 같다. 아니 벌써 풍화되어 다 날려버리고 한줌밖에 없는 거다. “치맛자락을 살짝 쥐어 들 때, 다가오던 시간이 외씨버선에 밟혔다. 정중히 찍힌 발자국은 하얗게 말라가고 일찍 디딘 자국은 바람에 들려 분분했다.” 언젠가부터 한 구절을 만들어두고 매 순간 몌별(袂別)을 준비해 왔다. 그러나 꽃잎이 어지럽게 흔들리니 애가 탄다. 세월이 부는 벚꽃동산 위에서 한 가락이, 마치 흩어지는 마지막 한줌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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