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아름다운 얼굴 상계동의 슈바이처 이인영

새해의 눈꽃처럼
남대문 바로 옆 태평로의 100평 가까운 넓은 집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 조부님이 궁의로 한의원을 하여 돈 걱정이 없었고, 집은 서울 한복판이어서 신문사 마당으로 쓰려고 조선신문사에서 말을 걸어오기도 할 정도였다. 옛 얘기를 들으니 이광수 소설의 주인공을 만난 듯 재미가 있어 요모조모 살펴보게 된다.
상계1동의 은명내과, 그리고 김경희 박사(81세). 흑백영화에 나오면 참 좋을 듯한 책상이며, 손 씻는 하얀 법랑 대야 두 개며, 자꾸 빠져 일부러 나사 부분을 녹슬게 하여 고정시킨 의자며…. 그 많은 돈과 능력을 갖고도 타협하지 않고 누굴 위해 검소하고 누굴 위해 맑은 건지 환하고 깨끗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6대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집안의 5형제 중 맏이. 그가 배재중학을 다니던 16세의 어느 날, 일주일 내내 눈이 붓도록 울었다. 정동교회 부흥회에서 자신의 죄를 통렬히 깨닫고 가슴이 몹시 아파 울고, 또 용서받고 구원받은  영적 느낌으로 충만하여 울었던 것이다. 그 죄란 ‘부모를 속였던 죄, 부모 몰래 장롱에서 돈을 좀 꺼내 가졌던 죄, 또 골목길에서 마주치던 너무도 예쁘던 소녀를 속으로 그리던 죄…’ 등이다. 진실한 소년의 죄의식이 해방되던 그날이 느껴져 뭉클하다.
그 시절의 지식 청년, 소년들 중엔 순수하고 바른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일까? 부잣집 지주의 아들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민족민주주의니 공산주의를 신봉하기도 하고, 농촌 계몽에 앞장 서기도 하고,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기도 했으니….
김경희 원장도 부잣집 손주였으나 가난한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하고, 교회 마당의 햇빛 쏟아지던 그날들의 화사한 꽃들을 느끼고, 병아리가 죽어도 눈물을 짓던 섬세한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새로 태어난 기쁨에 더는 죄 짓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가 사랑하는 신이 바라는 대로 살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꼭 새해의 눈꽃처럼….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김남조의 ‘설일(雪日)’ 중에서

희생을 거름삼아 피는 꽃   
우리는 언뜻 꿈꾼다.  멋진 삶- 성공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마음의 여유로 문화 생활도 즐길 줄 알고, 자녀는 공부 잘하고 인격적이며 착하기까지 하고, 또 가진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뚝 떼어 이웃을 위한 일도 열심히 하고….
과연 그러한가? 김 원장은 상상과 달리 고생도 많이 했다. 부잣집 손주도 세상의 변화에는 어쩔 수 없었다. 세브란스에서 근무할 때 진주만 습격 후 마지막 발악을 하던 일본군에 징용되어 목숨을 건 탈출을 했고, 해방 후 개업했던 병원 문을 닫고 의학 공부를 더 하려고 일본에 밀항했던 그는, 힘든 공부를 하며 고구마로 연명하여 영양실조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때론 학비가 없어 의인의 도움도 받았다. 다섯 차례인가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병은 10가지 이상(중증 당뇨에 호흡기 궤양, 신장염, 간장병, 디스크, 폐기종, 협심증, 부정맥, 전립선염 등)을 지녔다. 어찌 고통의 세월이 아니었으랴! 일본에서 박사과정까지 8년의 유학 생활을 힘겹게 마치고 심하게 병든 몸으로 귀국했을 때, 어머니는 낙심하여 한 달도 못가 돌아가셨다.
아! 어머니!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신학교 출신인 아버지와 결혼하여 대갓집 맏며느리로 모진 시집살이를 하며 살아오신 분. 저녁 식사 후 희미한 전등불 아래 입으론 찬송가를 부르면서 뚫어진 양말에 전구를 끼워 터진 곳을 꿰매시던 어머니. 평화롭던 그 모습. 6.25 당시 부산 피난 시절, 콩나물 장사를 하여 식구들을 연명시켰던 알뜰한 어머니가 잘난 맏아들에게 효도할 기회를 안 주시고 떠나가신 것이다.
좌절, 절망은 그때 터져 나왔다. 좌절의 연속. 누군가는 위대한 좌절이라고 명명했다. 절망은 희망이 얼마나 밝은 것인지 선명하게 드러내며 갈망을 실천으로 유도했다. 살기 위해 활동해야 했고, 활동은 자신의 꿈을 긍정으로 인도했다. 은명회는 이렇게 태동했다. 아버지 김은식 장로의 ‘은’자와 어머니 서명신 권사의 ‘명’자를 땄다. 멋진 삶은 고통, 좌절, 희생을 거름 삼아, 친구 삼아 피는 꽃이었다.

두 사건   
어릴 적 두 사건과의 만남이 지금의 그가 있게 된 재료다. 하나의 말도, 하나의 사건도 우리가 가슴에 담고 아끼는 정도에 따라 자랄 것이다.
16세 때의 부흥회 사건과 폐결핵으로 친구 둘을 하늘로 보낸 사건은 그가 의술이란 도구로 신의 뜻에 맞는 삶을 살게 한 요인이었다. 1941년 세브란스 의전 2년 때부터 답십리 보육원으로, 그후엔 만리동으로 진료하러 다녔다. 연락이 오면 진료 가방을 챙겨 들고 만리동 산꼭대기로 뛰어가는 의사. 얼굴까지 창백했을 터이니 ‘개선문’의 ‘라비크’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넘나드는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그가 밤이면 닦아 놓는 그의 양심은 늘 반짝거려 그의 삶을 되비추는 빛이 된다. 1945년에는 기독교 동지회를 결성하여 해방되어 귀국하는 귀환 동포들을 무료 진료로 도왔다. 그리고 자연스레 ‘성누가 의원’이란 이름을 달고 당당히 개업도 했다. 부족한 의술을 크게 깨닫고 일본 밀항까지 도모했던 것도 그에겐 순리였다. 그 길은 편히 사는 길이 아니었고, 젊은 아내하고도 장장 8년을 떨어져야 하는 길이었으며, 남의 나라에서 배 곯고 병 얻고 학비까지 도움 받아야 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은명회’와 ‘천원 진료’   
“아내는 나보다 더 통이 커요.” 100만 원을 하려 하면 200만 원을 하라는 아내에게 그는 늘 고맙고 미안하단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는 구성진 노래가 세브란스 의사, 간호사 사이에 크게 유행하던 때, 후배의 소개로 맞선(?)을 봤다니 자유 연애인 셈이다. 맑은 공기의 조용한 덕수궁을 둘이서 산책까지 하고, ‘고상한 용모의 처녀’라는 첫인상까지 새겨 준 여성…. 게다가 이화여고와 사범학교를 나와 국민학교 선생님을 하던 인텔리였으니, 그에게 부모가 적극 미는 여성이라도 따로 있었다면 연애 소설도 한 편쯤 엮었음 직하다. 모든 것을 참고 따라준 아내가 아니었다면 남편은 그 뜻을 펼치기 어려웠으리라. ‘최선의 동반자’라는 찬사와 함께, 그는 평생을  아내만을 사랑함으로 고마움에 보답했다.
귀국 후 개원한 염천교 근처 병원은 잘 돼 나갔다. 가족들 생계 때문에 아픈 몸을 이끌고 강행했지만 10년 동안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아픔이 복병처럼 찾아왔다. 한 달 내내 복통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위암이 아니고 위염이었지만 진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되풀이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자신을 본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1969년 3월, 신림동의 교회에서 16명의 환자에게 무료 진료를 한 것이 공식적인 은명회 사업의 시작이었다. 그 후 답십리 청계천 뚝방과 망원동, 한강 일대에서 의료 봉사와 구호 사업을 하였고, 치료 중 수술이 필요한 사람들은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가 입원, 수술시켰다.
1984년에는 당시 영세민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을 찾다 상계동에 은명내과의원을 개원하여 ‘천원 진료’를 하였다. 간단한 주사에서 심전도 검사까지 일체 1,000원이었는데, 의료 보험 제도 실시 전이니 매우 저렴한 가격이었다. 1985년 은명장학회 설립 외에도 1986년부터 심장 수술 후원, 1990년 중계동 무료 진료소 정동센터 건립, ‘은명봉사의 전화(무료 도우미)’ 개설, 1996년 생명사랑 인간회복 운동 전개, 1998년 한국간협회 설립, 그리고 2001년에는 ‘은명마을’도 설립하여 무료 급식,생활비 보조 등을 하고 있다. 1996년에는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전 재산에 가까운 53억 원 상당의 토지를 기증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 커다란 숫자에는 아내를 포함한 가족들의 마음이 합해져 있었다.

젊은, 김경희 원장
81세의 구부정한 김경희 원장이 점퍼 차림으로 아파트 계단을 내려온다. 여느 때처럼 뛰었다 걸었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꿈과 소명이 녹아 있는 때묻은 장소 -은명내과로 향한다.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로. 이 걸음으로 얼마나 걸었던가!
장학 사업을 하나 하려 해도 공고하여 추천받아 심사하고 발로 가서 확인하고…, 추호도 소홀함이 없이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 혹시 형편이 좋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게 되면 너무도 딱한 상황에 처해 있는 미래의 자선사업가가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간을 소중히 다룰 수 있는지 그가 보여준다. 아침 6시면 일어나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주십사’ 기도한 후, 건강을 위해 복식 호흡을 하고, 영지버섯물 마시기, 성경 읽기, 의학 공부, 스케줄 검토, 5분간 뜨거운 물에 발 담그기를 차례로 한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우유와 빵으로 간단한 식사를 한다. 오전 8시 50분 아내의 전송을 받고 저녁 6시까지 병원 진료, 그 사이 사이 ‘푸로폴리스’라는 약을 몇 방울씩 물에 타 마신다.
목요일에는 병원 진료가 끝나자마자 정동교회 중계동 무료진료소로 가 또 다시 진료를 하는데, 그 날은 우유 한 컵과 새우깡으로 저녁 식사를 한다. 평일에는 아들 집에서 아내와 저녁을 먹는다. 집에 돌아오면 더 나은 진료를 위해 공부를 하고, TV를 보고, 아내와 편안하고 조용한 시간을 갖고…, 그 다음에 일기 쓰고, 12시 전후해 이도 닦고, 양심도 닦고, 용서도 빌고, 환자의 쾌유도 간구하고, 잠을 잔다. 그 많은 일을 하루에 할 수 있다니! 하루란 참 길다!
70세가 되던 해에, 의사라면 계속 공부해서 양질의 의료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며 세브란스에서 2년 동안 내시경 관련 공부를 더 했을 만큼 열정과 순수를 간직하고 있는, ‘젊은’ 김경희 원장. 그의 인사를 받고 돌아가는 길.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가 청정수역 산천어를 부추기듯 깨끗해진 느낌이 들어 잰걸음을 걸었다.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