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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서울아산병원 의사들, 안나푸르나를 가다 김희수

우리는 지난 1월 22일부터 2월 2일까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해발 4,130m) 트레킹을 하고 왔다. 트레킹 참가 인원은 아빠(김동관-흉부외과)를 포함하여 서울아산병원 선생님 8명(한오수-정신과, 안태영-비뇨기과, 장재석-정형외과, 홍석준-내분비외과, 김광국-신경과, 김순배-신장내과, 김혜진-신경과)과 서울대병원의 김유영ㆍ최용 선생님 그리고 가족, 친구, 지인 등 모두 23명이었다.

인천공항을 떠나 네팔에 도착하여 카트만두에서 1박한 뒤 포카라로 조그마한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 비행기는 장난감 비행기의 확대판처럼 생겼다. 승무원이 문을 수동으로 닫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 비행기가 뜰까?’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륙 전 승무원이 솜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이 솜을 잘 챙겨두어야 한다. 비행기 엔진소리가 굉장히 시끄러워 트레킹을 시작하기도 전에 귀를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 비행이 제발 무사하도록 속으로 빌고 있을 때쯤이면 창가로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다. 산들이 위용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디딜 곳들이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이 비행기에 사고가 나면 어떻게 대처할까’였다.

인원 4명 이상이면 주방팀 동행
무사히 포카라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 들어가 나야풀(해발 1,070m)에서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했다. 첫날은 모든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낮은 지대에선 당나귀로 물자를 운반하는데 당나귀 무리가 너무 예뻐서 눈길을 끌었다. 우리 앞에서 머리에 짐을 지고 유유히 걸어가는 현지인을 만나면 또다시 놀라움에 셔터를 눌러댔다. 첨단 등산장비로 무장한 우리를 조롱하듯 어린아이들도 슬리퍼만 신은 채 무거운 짐을 들고 우리를 가뿐히 제치고 갔다.
사진을 찍다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산에서 처음 먹는 점심은 비빔밥이어서 현지음식으로 가득찬 식탁을 기대한 나를 빗겨갔다. 인원이 4명 이상이면 여행사에서 주방 전담팀을 꾸려 식사를 책임졌다. 더군다나 우리 팀은 23명의 큰 단체여서 주방팀만 8명이었다. 우리가 아침식사를 마치면 식기를 닦아 광주리에 담고 우리를 앞질러가서 점심을 준비하고, 또 그렇게 저녁을 준비했다.
우리 팀 셰프는 특히 네팔의 한식당 주방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어서 트레킹 내내 한식을 잘 먹을 수 있었다. 이 분들의 음식을 먹고 한국에 돌아간 사람들이 아내와 음식 문제로 많이 다툰다는 비화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이다.

생리현상 해결도 큰 문제
단 음식들은 체력을 많이 소모했을 때 유용하므로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트레킹을 하다보면 몸의 신호에 민감해진다. 걸음이 무거워지고, 길이 더 힘들게 느껴진다면 몸이 100% ‘간식 타임’을 외치는 것이다. 이럴 때 초콜릿을 먹으면 아주 좋다. 초콜릿 이외에 추천할 만한 간식은 양갱이다. 먹어본 사람은 양갱의 맛과 기능에 감탄할 것이다.
먹다보면, 아니, 트레킹을 하다보면 목이 마르다. 산에서는 강이 간혹 보이지만 이 깨끗하고 맑아 보이는 물처럼 조심해야 할 것도 없다. 산의 물에는 온갖 오염물과 빙하의 이물질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 마셨다간 하산을 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우리처럼 주방팀이 함께 갔다면 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로지(lodgeㆍ산장)에서 물을 사 마시면 된다.
먹고 마시는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는 법. 이 또한 로지가 해결해준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한 장소와는 약간 다르다. 수세식 화장실의 둥그런 부분이 없어지고 대신 양옆에 발판이 생긴 듯한 물체가 우리를 기다린다.
대부분의 네팔 화장실에는 두 개의 통이 놓여 있다. 하나는 휴지통, 또 하나는 물통이다. 그 물통에는 컵이 하나 달려 있다. 볼일을 보신 분들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차림새를 잘 추스르고, 물통에서 물을 날라 자신의 피조물과 헤어지면 된다.

가장 큰 장애는 고산증(高山症)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와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가는 길은 난이도보다 고도 때문에 어려운 곳이다. 고도가 높기 때문에 고산증에 걸릴 수 있다. 고소에서는 수분 증발이 많아 소변양이 줄어든다는 데도 긴장감 때문에 요기를 더 자주 느낄 수 있다. MBC에서 ABC까진 약 2시간 30분이 걸린다. 이 긴 시간 동안 요기를 참고 걷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공중화장실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는 인솔자에게 얘기를 해야 한다. 그러면 인솔자는 일행에게 잠시 쉬자고 말한 뒤 일행을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다행히 큰 바위들이 곳곳에 많이 있다. 이 돌들 중 몸을 온전히 가릴 곳을 찾아 뒤에 숨은 뒤 해결한다. 유유히 일행에 복귀하면 인솔자는 다시 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부끄럽지만 필자는 이때 처음으로 노상방뇨를 경험했다.

트레킹을 갈 때는 산속에서의 7박 동안 씻지 못한다는 각오로 임하는 게 좋다. 로지에는 물론 샤워장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태양열 방식이라 7~8명분만 낮에 데워 놓는데 우리 일행에 여자가 9명이어서 남자들은 샤워를 못했고, 여자들도 3,000m 이상에서는 금지시켰다. 찬물로 샤워를 하면 고산증에 걸릴 확률이 커지기 때문에 자제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머문 로지 중에서는 딱 한 군데, 고라파니만이 가스를 사용했다. 3~4일 심한 경우 5일 동안 묵은 땀과 때를 따뜻한 물에 씻어 보내는 건 경험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샤워는 대부분
한 번에 100루피이다.
샤워를 4일 정도 못 할 때쯤이면 트레킹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이다. 곳곳엔 현지인들이 만들어 놓은 돌길이 유실된 곳이 보인다. 이미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체력을 소진한 사람들에게는 힘든 길이 아닐 수 없다. 한 군데에서는 3년 전 산사태가 크게 나면서 쉬운 길이 사라져 흙투성이의 산을 힘들게 넘어야 했다. 앞사람이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흙먼지가 올라와 이내 메케해진다. 또한 흙에 다리가 빠져 걷는 데 힘이 더 든다.
촘롱에서 MBC까지 가는 길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길에는 ‘천국의 계단’이라는 곳이 있는데 온통 너덜길이어서 걸을 때 균형을 잡는 데 신경을 더 써야 했다.
고산증 또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은 시누아에서부터 고산증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MBC를 지날 때, ABC에서 묵을 때 고산증을 겪었다.
고산증은 우선 식욕부진과 함께 나타났다. 그 후 속이 메스껍고, 두통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며,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심한 경우 기침 또는 폐부종이 일어나 하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우리 팀에서도 몇몇 분은 두통으로 괴로워하셨다.

안나푸르나, 말로 표현할 길 없어
아빠에게 “왜 이 힘든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왔냐?”고 물었더니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8,000m 이상 14좌 중에서 가장 접근이 쉽다고 했다. 4,000m만 가서도 8,000m 고봉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로지가 잘 되어 있어서 히말라야 트레커들의 입문 장소란다.
산에서의 3일째, 푼힐 전망대(3,210m)에서 파커 없이 일출을 기다리다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게 무엇인지 깨달은 날 ‘자연’을 느꼈다. 전망대 맞은 편엔 갓 모습을 드러낸 해가 떠있고, 옆에는 마차푸차레(6,993m), 북동쪽에는 안나푸르나 남봉(7,219m), 북서쪽에는 세계 7위봉인 다울라기리(8,167m)가 듬직하게 서 있었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푼힐을 내려와 다음 로지로 향하던 길, 아래에서 보았을 때 구름이던 것이 어느새 안개가 되어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손오공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트레킹을 하고 있지만 상상 속의 나는 구름을 살짝살짝 밟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아빠에게 “왜 이 추운 겨울에 왔냐?”고 했더니 지금이 건기라서 산 정상들의 파노라마를 볼 확률이 가장 높다고 했다.
타다파니의 로지에선 ‘신의 산’ 마차푸차레와 만났다. 포카라 공항부터 ABC까지 계속 보이던 마차푸차레의 모습을 로지 마당에서 멋있게 볼 수 있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물고기꼬리 같은 봉우리를 그 로지에서는 차를 마시며 원하는 만큼 볼 수 있었다. 여신이 산다는 신성한 산이 동네 산처럼 정답게 느껴졌다. 석양이 질 때, 다음날 해가 뜰 때의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남봉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7일째 되는 날에는 ABC 전망대(4,130m)에서 안나푸르나 주봉에 쌓인 눈이 붉은 빛으로 점점 물들어가는 일출을 보면서 자연의 물감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엽서로만 봤던 풍경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곳.
그 곳에 내가 갔다는 뿌듯함. 인간이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또 한없이 커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곳. 직접 신을 만나진 못했지만 신을 너무나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곳. 그곳에 내가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은 이런 말을 남기셨다.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들이 있다. 히말라야를 가본 사람과 가보지 못한 사람.”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이 세상 산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산은 우리를 트레킹 사두(수도승)로 만들어버렸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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