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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나 “아산에게는 불가능이 없었다” 김영주

내 나이 올해 구십이다. 거실 흔들의자에 앉아 정원을 내다보노라면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가장 많이 떠오르는 건, 내 인생의 3분의 2 가량을 함께 보낸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와 얽힌 추억이다. 설립자와 나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기에 서로 청춘일 때 만나서 처남과 매제가 된 뒤 60여 년 동안 한 배를 타게 됐을까.
내가 설립자를 처음 만난 건 일제치하이던 1940년대 초였다. 당시 설립자는 서울 신설동에서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운전기사였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설립자는 20대 후반, 나는 20대 초반인 한창 나이일 때였다.  일제시대의 운전기사는 요즘과 달리 인기 있는 직업이었다. 지금의 항공기 조종사보다 숫자가 적을 때여서 임금이 무척 높았다. 그만큼 낭비벽이 있는 직업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기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 운전기사’라는 말이 돌았을까.

부지런하고 신용 있어서 큰일 할 젊은이
그때 내가 소속돼 있던 운수회사가 아도서비스와 거래하고 있어서 차에 이상이 생기면 그 곳에 가서 정비를 받곤 했다. 정비소에 차를 맡긴 운전기사들은 영화를 보러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기 일쑤였다. 정비가 끝나면 청구서 금액을 실제보다 부풀려 만든 뒤 그 차액을 정비소와 나눠 갖는 부조리도 다반사로 저질렀다.
나는 이런 짓들이 천성적으로 싫었다. 두주불사(斗酒不辭)이긴 했지만 하루 일과가 끝난 뒤 내 돈으로 사 마시는 술이 좋았다. 정비소에 차를 수리하러 가면, 나는 기술자들 곁에 붙어 서서 귀찮을 정도로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 고향인 전남 화순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남선탄광이라는 회사에 들어가 운전을 배울 때도 운전 기술만이 아니라 자동차의 작동 원리까지 알고 싶어서 틈만 나면 엔진을 들여다봤다. 그렇게 기계에 대한 호기심이 높던 차에 정비 기술자들을 만났으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이런 나를 설립자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듯하다. 하루는 설립자가 “나와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설립자에 대해선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 ‘부지런하고 신용 있는, 훗날 반드시 큰일을 할 젊은이’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나 또한 설립자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설립자에게는 호탕하면서도 치밀하고, 열정적이면서도 합리적이며, 아랫사람의 마음을 얻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정비 기술자와 동업해서 아도서비스를 운영하던 설립자는 그 동업자와 손을 뗀 뒤 나를 데리고 일하면 되겠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설립자는 나를 “기계 박사”로 부르고 있었다. “엔진소리만 듣고도 차의 아픈 부위를 짚어내는 자동차 귀신”이라는 칭찬도 해주었다. 비범한 인물에게 듣는 칭찬도 과분한 판인데, 함께 일하자고 하니 안 따를 이유가 없었다. 설립자와의 동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설립자를 특별히 도운 건 하나도 없다. 그 날 이후 나는 줄곧 설립자의 심부름만을 해왔을 뿐이다.

설립자와 처남-매제 인연을 맺다
‘아도서비스 시대’는 1943년으로 끝난다. 아도서비스가 일제에 의해 일진공작소와 강제 합병되자 의욕과 정열을 잃은 설립자는 아도서비스 운영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곤 황해도 수안의 홀동금광 운송권을 따냈다. 트럭 10여 대를 이용해 광석을 평양까지 수송하는 일이었다. 이때 나는 차량 정비뿐 아니라 운전까지 직접 했다.
수안에서 평양에 이르는 길은 무척 험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갔다 올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운전기사들은 평양에서 놀다 오느라고 사나흘을 허비했다. 안이한 분위기를 바꿀 필요를 느낀 나는 ‘당일치기 운전’의 시범을 보였다. 설립자의 신임을 받는 내가 이러니 다른 기사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설립자의 집은 서울 돈암동에 있었다. 스무 평 남짓한 기와집이었다. 이 집에 설립자의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혼인한 부부의 아이들까지 20여 명의 대가족이 모여 살았다. 나는 돈암동 집에 자주 들렀다. 설립자가 아도서비스에서 일할 때부터 “어이, 일 끝나면 우리 집에 가서 저녁이나 먹지” 하며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돈암동 집에 출입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나와 설립자의 유일한 여동생인 희영(85)과의 정도 깊어 갔다.
잘 알려진 대로, 설립자는 6남1녀의 장남이다. 첫째 동생인 인영(전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나와 동갑이지만 왠지 서먹서먹했다. 그건 아마도 학력 탓이 클 것이다. 인영은 원래 소학교도 못 나왔지만 독학으로 일본에 유학 가서 대학까지 다녔다.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고, 한번 읽은 책은 내용을 줄줄 외웠으며, 특히 영어를 잘 했다.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람이었다. 해방 뒤에 잠시 동아일보 기자를 했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둘째 동생인 순영(전 성우그룹 명예회장)은 나보다 두 살 아래이지만, 처지와 성격이 비슷해서 죽이 잘 맞았다. 설립자의 아우 중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낸 이는 바로 순영이었다.
순영이 바로 밑이 내 안사람이 된 희영이고, 그 밑으로 세영(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신영(전 동아일보 기자), 상영(KCC 명예회장)이 있었다. 하지만 세영부터는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격의 없이 지내지 못했다. 해방 직전에 결혼한 나도 한동안 처갓집 신세를 지면서 설립자의 대가족 대열에 합류했다.

고령교 복구공사의 악몽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설립자는 리더십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 카리스마는 집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설립자의 말은 곧 법이었다. 나를 포함한 설립자의 형제들은 우애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설립자의 명령에 따라 살았다.  그렇다고 설립자를 가부장적인 권위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그때는 가족 중의 누군가가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대가족 전체의 생존이 위태로웠던,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에 이르는 험난한 시기였다.
설립자의 부인인 변중석 여사는 나와 동갑이었지만, 설립자라는 ‘어른’의 아내여서 깍듯하게 모셨다. 그 분 또한 나를 “고모부, 고모부” 하면서 참 잘해 주었다. 속이 정말 깊고,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다. 여자로서 그런 분은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돌이켜보면, 설립자 집안을 일으킨 분은 설립자의 모친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친께서 시집을 오자 아무 것도 없는 집에 시동생만 6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누에치는 일이었는데, 누에를 기르기 위한 뽕잎도 산에 올라 산뽕을 따다 쓰셨다. 그건 공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에가 돈이 덜 되니까 밤새 삼베를 짜셨다. 설립자의 부친은 그냥 점잖은 분이시고, 모친이 그렇게 부지런하셨다. 잠시도 쉬지 않으셨다. 아무래도 설립자의 근면성은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듯하다.
설립자가 현대건설 창업 초기에 겪은 가장 큰 시련은 고령교 복구공사였을 것이다. 1953년 4월에 복구를 시작한 고령교는 대구와 거창을 잇는 다리였다. 엄청난 난공사에 적자 공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공사를 마쳤지만, 빚을 갚기 위해 설립자의 둘째아우인 순영이와 내 집까지 팔아야 했다.
집을 판 순영이와 나는 서울 초동의 다리 옆, 적산공장 자리에서 몇 년을 살았다.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딸린 집이었지만, 나는 이 정도면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립자 마음은 달랐던 모양이다. 하루는 나와 순영이네가 사는 모습을 와서 보고는 “미안하다. 내가 나중에 부자 되면 꼭 큰 집 사줄게”라고 손을 꼭 잡으며 다짐했다.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설립자에게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설립자는 예나 이제나 내게 ‘이 세상 최고의 위인(偉人)’이기 때문이다. 항상 신선한 아이디어가 넘치고, 하면 된다는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그런 분이 앞으로 또 나올 수 있을까. 설립자에게는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설립자의 말씀을 ‘지상 최고의 법’으로 여겼고, 따라서 설립자의 지시를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

설립자에게 받은 과분한 사랑
그래서였을까. 설립자는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어놓기도 했다.
 ‘1970년 12월 문산에서 고속도로 1차 공사를 끝낸 김영주 상무에게 조선소를 지어야 하므로 울산으로 내려가라고 하니까 김 상무는 “예, 알겠습니다. 내려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영주는 내 매제가 되기 전 총각시절부터 내가 무슨 일을 시키든 단 한 번도 군소리를 붙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곤 울산에 내려가 도크를 파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좋은 장비로 24시간 작업해서 3천㎥의 물량을 처리하는데, 매제는 수리한 구식 장비로 같은 시간에 4천5백㎥의 물량을 처리해냈다.’
현대중공업은 설립자의 꿈이자 나의 꿈이었다. ‘최고의 조선소’와 ‘최고의 선박엔진’은 조선소 건설공사를 시작한 날부터 내 필생의 목표가 되었다. 당시 울산의 허허벌판에서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일하기 일쑤였지만, 일본을 따라잡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일하다 보니까 하나도 피곤한 줄 몰랐다. 오히려 일이 재미있을 뿐이었다.   현대중공업 사장과 현대엔진공업 사장 및 회장을 역임하며 조선과 선박엔진 분야를 세계최고 수준에 올려놓은 나는 1989년, 설립자의 배려로 한국프랜지 회장에 취임했다. 자동차 부품을 주로 생산하는 한국프랜지는 2000년부터 내 장남이 회장을 맡고 있다.
나는 설립자에게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이미 젊을 때부터 ‘기계 박사’라는 과찬을 들어왔고, 현대에 몸담고 나이 들어가던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내가 하는 일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돈을 얼마 쓰건, 혹시라도 일을 중간에 그만두건 가타부타 말이 없으셨다. ‘저 놈은 내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지, 자기 욕심을 절대 안 챙긴다’는 믿음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나보고도 자서전을 내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 일생은 곧 현대의 역사이므로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나는 회고록을 출간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살아온 날의 대부분이 설립자와 겹치는데, 그 자서전인가 뭔가를 냈다가 만에 하나라도 설립자에게 누를 끼칠까 염려스럽다.
나는 설립자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주인이 사라지면 조용히, 함께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설립자의 과분한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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