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문화가 산책 벼루장 신근식 오윤현

‘벼루에 미친’ 정철조를 추억하다
언젠가 한양대 정민 교수가 쓴 정철조(1730~1781)라는 인물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대단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영조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고 연암 박지원 등과 교류하며 일찍이 기계에 눈을 떴다. 그 덕에 해시계를 만들고 지도를 제작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더 별난 사실은 그가 벼루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집을 나설 때 그는 으레 칼과 송곳을 갖추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돌이 보이면 그것들로 벼루를 깎았다. 돌을 다루는 솜씨가 어찌나 뛰어난지 마치 밀랍처럼 깎고 파냈다. 다른 석공들처럼 벼루를 풍(風)자형이나 일월(日月)형으로 깎지 않았다. 돌의 생김새와 성질을 최대한 살린 뒤 거기에 가을 국화나 귀뚜라미 등을 아로새겨 한껏 멋을 냈다.

정민 교수에 따르면, 당대 예원(藝園)을 주름잡던 강세황도 그의 벼루를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천여 개의 벼루를 봤지만 단연 으뜸이다.”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벼루가 한 점 전해오는데, 사진으로 봐도 일반 벼루와 사뭇 다르다. 둥글넓적한 까만 돌 안쪽에 연당(먹을 가는 부분)을 닦아놓고, 그 위쪽에 구불구불 연지(먹물이 고이는 부분)를 파고, 둥글한 연순(벼루 둘레)에 꽃과 구름무늬를 아로새겨 넣었다.

새삼, 52년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호 석치(石癡)처럼 ‘돌과 벼루에 미쳐 지낸’ 정철조를 추억한 것은 벼루장 신근식(68·이천시 사음리)씨 때문이다. 신씨는 정철조와 닮은 점이 많다. 우선, 돌 다루는 솜씨. 신씨의 작업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마치 돌을 나무보다 더 자유자재로 다룬다. 가능하면 원석의 생김새와 성질을 살려 문양을 새기는 점도 비슷하다. 독특하게 신씨는 충북 단양(영춘)에서 나오는 붉은 빛 자석(紫石)만 사용하는데, 원래 모양과 결을 살려 만드는 덕에 똑같은 벼루가 하나도 없다.

또 하나 비슷한 점은 벼루에 새긴 문양이 아름답다는 점이다. 신씨의 벼루 역시 정철조의 벼루처럼 새긴 문양이 각기 다르다. 어떤 벼루에는 용이 똬리를 틀었고, 어떤 벼루에는 학이 날거나 개구리가 뛰어다닌다. 더 특별한 것은 음각이 아니라 모두 양각(돋을새김)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의 벼루에 있는 용이나 포도 등은 더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친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벼루를 깎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50년 전 열다섯 살에 처음 돌을 만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비석의 이수(비석 머리에 새겨 넣는 뿔 없는 용)를 새기는 석공이어서 자연스럽게 입문했다. 그가 처음 돌을 만질 무렵 그의 집안은 충남 보령에서 오석(烏石)과 남포석으로 벼루를 만들어 팔았다. 눈썰미가 좋은 그는 기술이며 문양을 한눈에 익혔다. 그 덕에 돌을 만진 지 20일만에 “3년 한 사람보다 낫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문제는 돌이었다. 오석 벼루는 흔했지만 귀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 탓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늘 좋은 원석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단양의 영춘에서 자석을 발견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가족은 영춘으로 이사해 영춘공예사를 개업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석 벼루를 만들어 서예가들에게 내놓았다. 아름다운 색과 무늬 덕에 인기가 좋았다. 특히 일본인들은 만드는 족족 자석 벼루를 거둬갔다. “은은한 붉은 색과 양각 문양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듯하다”라고 신씨는 기억했다.

자석 벼루의 또 하나 장점은 물을 흡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먹을 갈고 뚜껑을 잘 덮어놓으면 그 다음날에도 고스란히 먹물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입자가 고와서 “자석 벼루 먹물로 글을 쓰면 광채가 난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같은 유명세 덕에 자석 벼루는 20여 년간 청와대까지 들어갔다. 1970년대 후반부터 김영삼 정권 초기까지 대통령 하사품으로 활용된 것이다. 많으면 한번에 800여 개씩 납품했다. “정년퇴직하는 교장 등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그 덕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1998년에는 경기도로부터 무형문화재 26호로 지정받기도 했다.

후계자 없이 홀로 걷는 길
그가 벼루를 만드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원석을 구해 돌을 깎기 좋게 다듬은 뒤, 그 위에 문양을 그려 넣은 기름종이를 붙인다. 그리고 그 문양대로 돌을 깎아나간다. 사용하는 공구는 모두 30여 점. 그 중 평미리라 부르는 조각칼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평미리를 잡은 그의 손이 춤추면 아무것도 없던 돌에 소나무가 나타나고 학이 날아다닌다. 가장 어려운 작업은 자그마한 매화꽃 무리나 낭창거리는 대나무다. 꽃술과 나뭇결까지 하나하나 새겨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승천하는 용이나 납작 엎드린 거북이 등은 선이 굵어서 비교적 세공하기가 쉬운 편이다.

너비가 5mm쯤 되는 평미리로 마당에 굴러다니는 자석을 직접 밀어보았더니, 의외로 부드럽게 돌이 깎여 나갔다. 하지만 5분 정도 하자 손마디마디가 얼얼했다. 이같이 고된 일을 하루 20시간 이상 한 적이 꽤 많다고 하니, 그의 고초가 어떠했으리라 미루어 짐작이 간다. 무게 100kg, 너비 50×80cm 정도 되는 돌을 정성들여 깎아야 겨우 벼루 한 개가 나온다.

작업 시간은 보통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하루 10시간씩 꼬박 이틀이 걸린다. “마음먹은 대로 조각이 나와 주는 날에는 밤새는 줄도 모르고 일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5년 전 그는 경기 성남에서 사음저수지가 발아래 펼쳐져 있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 왔다. 대장암 수술을 세 번 받고 생사를 오락가락하던 중,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그 덕인지 다행히 최근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게 조심스럽다. 작업 속도도 더디다. 과거에는 큰 벼루를 한 달에 몇 개씩 만들었지만, 요즘에는 1년에 겨우 큰 작품 몇 개, 소품 20~30개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팔리지 않아 요즘에는 족제비와 말총으로 만든 붓을 팔아 살림에 보태고 있다.

그는 자신이 온 생을 바쳐 해온 일이 내리막길에 서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손에서 돌과 공구를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직 내 벼루를 찾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넓은 창밖의 사음저수지에서 가창오리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5년 전 암 선고를 받을 때 이미 나는 죽은 목숨이다. 지금은 덤으로 사는 거다. 이제 욕심이 없다. 대가들에게 더 좋은 벼루를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후계자도 없이 홀로 걷는 길이지만, 그 꿈이 하루 빨리 실행되기를 바란다.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