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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상 수상자를 보며 ‘절망’ 반대편에 ‘희망’을 김재영

비가 말 그대로 보슬 보슬 내리는 오후였다. 초겨울이라고는 하지만 대기는 아직 적당한 훈기를 품고 있었고 마른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가늘고 유약한 빗줄기는 메마른 도시를 부드럽게 두드려댔다. 미처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들조차 작고 투명한 물방울들을 장식처럼 달고 생기를 되찾았다. 산책하기 좋은 오후, 나는 아산상 시상식장으로 향해 걸으면서 조금 행복하다고 느꼈다. 초겨울 대기 속에서 맡아지는 젖은 낙엽향이 좋아서만은 아니었을 거다. 그보다는 세상에 따뜻한 기운을 나눠주는 수상자들을 만난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행사장에서 대상을 받은 ‘전진상의원’의 배현정 원장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결단과 신념으로 생을 헤쳐 온 사람 특유의 기품이 느껴지는 여성이었다. 암울했던 칠십 년대라고 했던가, 그녀가 처음 서울의 시흥으로 찾아온 것이. 벨기에서 온 간호사 마리 헬렌 브라쇠르가 판자촌의 주치의가 되어 청춘을 다 보내고 중년을 지나 노년을 맞기까지, 그 긴 세월 동안 가난과 질병과 설움으로 몸부림치는 소외된 사람들 곁을 지켜왔다고 한다. 한결같은 정성으로 병을 치료하고, 삶의 조건을 개선해주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심어주었으리라. 순간 삼십사 년이란 시간의 깊이가 출렁, 옹졸하게 얼어붙은 내 가슴을 적셨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하며 겪었을 불편과 절망, 그리고 고된 일상…. 참고 인내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다. 타인을 위해 헌신하기엔 더욱 그렇다. 하루나 이틀, 혹은 한 달이나 두 달간의 선행이라면 몰라도. 어느 시인의 말처럼 버려진 연탄재만큼도 못한, 언제 한 번 누군가에게 따뜻해 본적 없는 나 같은 소시민으로서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시간의 축적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웃을 따름이다. 사랑을 나누기에는 너무 짧은 세월이었다는 듯이. 아직도 보살펴야 할 가난한 이웃이 너무 많아 시간이 부족하기만 하다는 듯이. 대상에게 주어지는 부상금 역시 운영난에 처해있는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를 위해 쓸 거라고 한다.

대상 수상자뿐 아니라 저소득 장애인들에게 무료로 치과진료를 한 결과 의료봉사상을 받게 된 재단법인 스마일, 반세기 이상 한국의 아동과 장애인을 위해 애쓴 공로로 사회봉사상을 받은 홀트아동복지회, 서울시립소년의집에서 42년간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준 복지실천상 수상자 김봉자 수녀, 소화누리 간호조무사 김순화 수녀와 자원봉사상 수상자 김영칠 씨, 제주교도소 윤평식 교위 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영예로움에 비해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들이다. 덕담을 나누는 명절날 아침처럼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들은 모두 오랜 시간 묵묵히 선행을 실천해온, 사랑이 몸에 배어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사람들이다. 깊고 그윽한 향기는 단상 옆에 장식된 노랗고 화사한 난향과 어울려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 중에는 이국의 향기를 내뿜는 사람들도 끼어 있었다. 먼 나라로부터 국경을 넘어와 이 땅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몽골과 필리핀에서 온 떠르지재벤과 로리아 고르테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가정을 지키고 행복을 키워가는 그들은 새로 마련된 다문화가정상을 받으며 함빡 웃었다.

약한 자를 구해 더불어 살며
행사장에서 나와 한참을 걸었다. 나는 오랜만에 인간에 대해 생각했다. 오랜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길러진 것이 선(善)한 마음이리라. 이기적 유전자라는 본성적 유혹과 냉혹한 야생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약한 자들을 구하고 더불어 살고자 노력해 온 인류의 염원. 그 축적된 염원이 원동력이 되어 진화된 고결한 정신!

아름다운 영혼을 만난 기쁨 탓인지 나는 좀처럼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오후의 대기는 조금씩 차가워졌다. 거리의 행인들도 적절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옷깃을 여미기 시작했다. 로힌턴 미스트리의 장편 『적절한 균형(A FINE BALANCE)』이 떠올랐다. 삶에는 피할 수 없는 절망이 있다. 그것을 한쪽 저울에 담고 반대편에는 희망을 담아 본다. 둘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것이 삶이다. 수상자들은 절망으로 기울어지기만 하는 현대인의 삶을 희망으로 지탱해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저녁이 되자 하나 둘 가로등이 켜졌다. 차갑게 술렁이는 도시의 불빛이 오늘따라 따뜻하게 빛난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난 때문일까. 밤이 깊어지는데도 마음은 점점 더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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