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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그대가 되어 아산상 대상 수상한 배현정 원장 이인영

삼성산 자락, 7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한 서울 금천구 시흥5동 골목에 ‘전진상의원・복지관’이 자리하고 있다. 벨기에 여성 배현정(본명 : 마리 헬렌 브라쇠르・63) 원장이 34년을 살아온 동네다. 배 원장은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의료사회사업을 하며,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하는 삶을 살아왔다.  배 원장을 비롯한 6명의 전진상 가족은 ‘온전한 자아 봉헌(全), 참다운 사랑(眞), 끊임없는 기쁨(常)’의 정신으로 함께해 왔다. 여성인 그들은 모두 독신이다. 
배 원장을 만나러 다세대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길을 간다. 흐릿한 날 덕에 옥탑방 위로 떠있는 태양을 본다. ‘신수・궁합・사주집, 뚱순이네 왕대포집, 운수대통 치킨센터…’ 등의 간판이 눈을 끌고, ‘뉴타운개발 반대’ 현수막이 펄렁이는 곳. 마침내 목련 나무가 창밖으로 보이는 전진상의원 2층 진료실로 들어갔다.
“아직 아파요? 제가 준 연고 썼어요?” 진료중인 배 원장이 최윤(78) 할머니의 어깨에 솟은 대상포진을 들여다보며 말한다.“얘 그렇지, 쟤 그렇지, 여러모로 거시기 하기 땜에… 너무 힘들었어. 그래도 요번에 주신 연고 땜에 힘이 덜 들어. 굵은 소금물 양재기에 풀어 약솜으로 찍어 살살 바르고….” 당뇨가 있는 할머니는 배 원장의 소개를 받아 백내장 수술을 했는데 대상포진까지 걸렸다.
“혈액순환제도 주고, 부드럽게 차근차근 말해줘. 배 선생님 안 좋아하면 누굴 좋아해?” 30년 전부터 이곳을 다녔던 최 할머니. 10년 전부터는 전진상의원에 자주 들린다. IMF 이후로 파지를 줍게 된 독거 할머니는 가끔 강냉이를 사와 고마운 마음을 전하곤 한다.

산동네서 인술 베푼 ‘벨기에서 온 천사’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남쪽의 작은 마을 ‘막시넬’에서 자란 배현정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가톨릭 평신도단체인 AFI(국제가톨릭형제회)에 입회했다. 그 후 성요셉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했다. 약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탄광지역인 고향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이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아온 배 원장. 그들을 보며 어려서부터 봉사에 온 생애를 바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그곳에서 26세의 처녀가 1972년 먼 한국의 땅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며 찾아온 것이다. 오자마자 김수환 추기경을 만날 수 있었다.
“시골도 중요하지만 서울 변두리 판자촌도 봉사가 시급해요.” 소록도로 가려고 하자 김수환 추기경이 말했다. 그리고 김 추기경의 알선으로 당시 가장 가난했던 이곳 시흥동에 반 지하 미니 2층인 37평짜리(현재는 300평)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다행히 숙대 약대를 졸업한 최소희 약사 , 이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유송자 사회복지사가 전진상의원의 창립멤버로 그 고단하고도 빛나는 삶 속으로 함께 뛰어들었다. 그리고 3년 후 가톨릭의대 간호과를 졸업한 김영자 간호사가 힘을 모았다. 의료보험제도가 없던 시절인 1975년. 배 원장은 약국과 무료진료소를 개설하고 가정방문간호를 시작했으며, 병원・약국・복지관을 결합한 ‘전진상가정복지관’을 설립했다. 배 원장은 의료와 사회복지의 통합시스템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걸 알았다. 약국 이윤과 국내외 후원금으로 진료 외에도 장학금 지급, 무료유치원・공부방(현재 지역아동센터) 운영, 노인복지사업과 생활법률상담도 해가며 주민들의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끌어안았다. 
환자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를 많이 접하자, 치료는 물론 가족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상담일지에 가계도를 3대까지 그렸다. 그들이 일어서도록 도운 것이다. 봉사의료진(현재는 50여 명)을 구성해 무료나 낮은 수가로 진료하고 가정방문간호사로 수많은 환자를 돌보았다. 진료과가 하나 둘 확대되자  상주 의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배 원장은 힘을 냈다.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 편입해 의학 공부를 시작했고 1985년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었다. 지금은 14개 전문진료과목 의사들이 정해진 요일에 와서 봉사한다.
의사가 된 후에도 매주 목요일에 왕진을 갔다. 한 밤에도 마다 않고 가는 그가 왕진한 환자 수는 8,000여 명에 이른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환자들을 많이 보아온 터라 1988년부터 가정호스피스를 시작하고,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봉사자를 한 팀으로 구성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을 했다. 그리고 2008년 숙원사업인 10병상의 ‘전진상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를 개설했다.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기간입니다”
2층의 호스피스 입원실 거실에서 말기암 환자가 TV를 보는 건지 무심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 배 원장을 보더니 가느다란 웃음을 보인다. 부은 얼굴이지만  환자가 편안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카메라 렌즈를 향해 사진 찍히기를 기다리는 환자와 찍는 사람 사이에 있는 침묵의 언어마저 거추장스러운 곳. 배 원장만이 자유로운 말을 내놓는다. “사진 함께 찍어줘서 고마워요.” 환자가 다시 미소를 짓는다. 거실을 지나 그 환자의 입원실에 들어갔다. 그가 사랑하는 가족사진과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기도문’이 붙어 있다.
“이 방에서 20년을 살았어요.” 작년까지 배 원장의 방이었던 곳. 입원실로 내놓았다. 침대에 앉으며 그가 눈으로 공간을 더듬는다. 환자를 위해 양보한 자리. 사랑의 기도가 수없이 바쳐진 소박한 방이란 걸 눈치챌 수 있다. 그 방을 나와 옆방으로 갔다. 어제는 두 분이 임종하고, 오늘은 입원 환자 7명이 호스피스 병실에 있다는데, 옆방에선 넓은 창으로 세상에서 가장 예쁜 감나무와 사철나무가 보인다.
“예쁜 손 찍어야… 약손이야.” 배 원장과 손을 맞잡은 환자, 리타(세례명) 선생님이 말한다. 미국에서 몬테소리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이다. 그가 다가가 자상한 말을 건넨다.
“우리 할 얘기 많잖아요. 옛날 얘기도 하고….” 환자는 그 말에 잠시 행복한 표정이 된다.
전진상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에서 배 원장은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가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라며 환자를 위로한다. 환자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라고 할 때, 보호자가 사랑하는 가족의 임종 후 찾아와, “평화 속에 떠나보내 참을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고 할 때의 감정은 그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구석구석을 본다. 사회제도 중 부족한 부분을 찾아 보완을 한다. 환자의 절실함을 듣고 방법을 찾아 헌신한다. 의료보험비를 못내 의료보험이 끈긴 차상위계층은 밀린 돈을 내주고 보험을 살려놓기도 한다.  전진상의원의 직원 20여 명은 원장이나 직원이나 봉급이 거의 같다. 배 원장은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축복인데 월급을 더 받다니요?” 하고 말한다.
“수도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일반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소외된 세상 곳곳에서 일하고 있어서 고맙기도 하지만, 누가 알아주기를 하나, 세상 속에 들어가서 일을 하다보면 힘들 때도 많을 텐데”….”하고 김수환 추기경은 미사 때 강론하곤 했다.
수돗물이 안 나와 10년 이상 영등포구청의 식수트럭이 내는 ‘딸랑 딸랑’ 소리에 반가워하며 지역민과 같이 애환을 나눠온 전진상 사람들. 그 한가운데서 배현정 원장이 말한다. “20대에 한국에 가도록 허락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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