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세 노인이 홈페이지를 운영한다고? 노인이 되며 겪는 고통을 이야기할 때 ‘고독고’나 ‘무위고’를 꼽는다. 젊은 사람들은 다들 제 볼 일 보느라 바쁘고 말 한 마디 붙여주는 이 없을 때의 고독과 일선에서 물러나 소일거리도 없이 그럭저럭 하루를 보내야 하는 고통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고통들이 사람을 더욱 늙게 만들고 병들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고(苦)’라 부르지도 않았을 것. 그럼에도 여기에 예순 여덟 나이에도 새롭게 자기 세계를 창조해 가는 노년의 모습이 있어 눈길을 끈다. 여느 노년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길을 걸어온 전기순 씨가 그 주인공인데, 황혼에도 자기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 줄 아는 열정과 용기가 있어 여느 젊은이보다도 젊게 살고 있다. 전기순 씨의 이력은 지나치게 평범하다. 68세. 2남 2녀의 어머니.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 얼마간의 직장 생활 후 결혼. 자식들 키우고 살림 돌보는 것이 주업. 결코 특별한 이력이 아니다. 우리 어머니, 혹은 할머니의 이력과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씨의 이력 맨 끝에 이젠 두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 홈페이지 운영자 그리고 캐릭터 디자이너. 현재 전씨가 매달리고 있는 일이다. 68세 노인이 홈페이지를 운영한다고? 놀랍지만 사실이다.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캐릭터와 그림들, 소소한 생활정보들, 그리고 일상을 스케치한 글들을 올려놓고 분주하게 방문객을 맞고 있다.
씨 뿌리는 아들, 열매 맺는 어머니 전 씨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데에는 막내아들 최석영(29) 씨의 도움이 있기는 했다. 고혈압과 노환에 시달리며 기운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위해 지난 여름 홈페이지를 제작해 주고 컴퓨터를 가르쳐준 것. 석영 씨는 그저 무료한 시간이나 달래 보시라는 뜻이었는데, 전씨가 뜻밖의 재능과 열정을 보이는 바람에 오히려 놀랐다고 한다. 씨는 아들이 뿌렸으되 김을 매고 가꿔 열매를 맺은 것은 전씨의 노력인 것이다. 석영 씨가 맨 먼저 가르친 것은 게임. 전씨는 80년대 유행했던 갤러그에 빠져 맹연습에 돌입한 결과, 오래지 않아 전수자인 아들까지 꺾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매달리는 스타크래프트에 도전해 만만찮은 실력을 쌓아가고 있다. 통신에 접속해 네티즌들과 한 판 승부를 겨루는 것도 겁내지 않을 정도의 실력. 이젠 거의 게임광 수준이다. 홈페이지 방문자들이나 친척들한테 이메일도 척척 보내고 다른 사이트 구경도 다니고 할 정도니 이만 하면 N세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전씨가 열심인 또 한 가지는 그림 그리기다. 컴퓨터나 그림이나 모두 지난 여름부터 시작한 것인데, 전씨의 그림 실력을 보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을 패러디한 ‘실버 비너스의 탄생’은 주인공을 백발의 비너스로 뒤바꿔 버린 작품인데, 창의력이 번득이고 재치가 넘친다. 또 책상 위에 수두룩한 캐릭터 그림들은 노인의 감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톡톡 튀는 것들뿐이다. 석영씨는 어머니의 디자인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해 앞으로 상업화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캐릭터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전문가인 석영 씨가 보기에도 그냥 썩히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들이었던 것. 아무래도 숨은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디 그게 재능만 가지고 되는 일일까.
‘너무 늦었다’라는 말은 없어도 되는 말 “컴퓨터도 재미있지만 그림 그리는 것에 더욱 애착이 가요. 일단 책상 앞에 앉으면 일어나기가 싫고 끝까지 완성을 해야 겨우 엉덩이가 떨어진다니까요.” 시험공부하는 수험생보다 더 열심인 것이다. 전씨의 때늦은(?) 도전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스스로의 노력 덕분임이 확실하다. 영어공부를 시작한 것만 해도 그렇다.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녀 영어를 배울 기회라곤 없었던 전씨. 중고생처럼 문법공부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씨는 알파벳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홈페이지 관리하고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팬들에게 이메일 답장이라도 써주려면 최소한 알파벳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 와서, 이 나이에 이런 건 해서 무얼할까?’ 이런 생각이 있었다면 전 씨의 새로운 인생은 없었을 것이다. 전씨의 바람은 소박하다. 기운이 닿는 한, 열심히 배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람을 덧붙이는 전씨. “나이 든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요즘은 세상이 힘들다 보니 실의에 빠진 사람도 많은데 그 사람들에게도 무엇이든, 언제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구요.” 전기순 씨는 우리에게 황혼은 그냥 흘려보내라고 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열정과 도전을 보면 ‘너무 늦었다’라는 말은 없어도 되는 말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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