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마더 데레사 왕초, 대빵으로 불리며 거친 부랑아, 알콜중독자, 나환자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 왜 마더 데레사는 78년 한국 방문 당시 축사를 개조한 초라한 방에서 그녀와 동숙하기를 희망했을까?
그날, 자회색의 평화롭고 고요한 경북 성주의 평화계곡에서 만난 최분이 수녀는 63세의 깡패 두목 같은 씩씩함뿐만 아니라 19살의 소녀 같은 여림과 맑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눈다는, 청빈. 맑은 가난이란 단어가 그날따라 왜 그리 좋은지.
“우리가 몇 년에 걸쳐 우리 손으로 돌을 모아 집을 짓고 겨우 방이라는 걸 완성했을 때 그 애들은(수녀님은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자식으로 생각한다) 지들끼리 다 정해 놓았어요. 1호는 누구 누구 방, 2호는 누구 누구…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다 짝을 정해 놓은 거죠. 그때 제가 ‘안돼!’ 라고 말했어요. 손이 필요한 장애 노인들이 8명이나 있었거든요. 그분들을 한 명씩 방에 넣어야 했어요. 그 순간 조용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묵념 자세로. 그때 도마가 ‘엄마…’하고 정적을 깨뜨렸어요. ‘내가 8명하고 아래층에서 살 테니 쟤들은 그렇게 지들끼리 살라고 해요…’( 이때 수녀님은 목이 메어 왔다.)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자기 방이란 걸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거든요. 걔들은 마음 맞는 사람과 제 방을 가져 본다는 설레임으로 들떠 있었던 거예요.”
삼천포시 선구동의 어린아이 최분이는 머리에 음식과 떡, 생선을 이고 급히 냇가로 달려갔다. 부모 몰래 다리 밑에 있는 전쟁 걸인들에게 갖다 주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그만 양철 조각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종아리에서 피는 줄줄 흐르고…. 그 아이는 그래도 기회만 있으면 그 일을 계속했다. 어느 추운 겨울 첫 새벽의 삼천포 부두. 최분이 어린이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땔감을 지고 나온 나뭇꾼을 발견하고 무엇이든 따뜻한 걸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골똘히 한다. 집으로 달려와 부엌을 보니 통대구를 넣고 끓인 먹음직한 미역국이 큰 가마솥에 가득했다. 아버지는 새벽낚시 가시고, 어머니는 시장에 가셨는지 안 계셨지만 너무 기뻐 나무꾼들을 사랑방에 들어오게 하고는 고사리 손으로 국을 퍼다 대접했다. 그걸 본 어머니는 기가 막혀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그날은 아버지의 생신날. 어머니는 손님을 초대하고 횟감을 준비하러 나갔다가 온 길이었다.
“이년아! 이제 줄 것이 없거든 네 오장육부를 울타리에 걸어놓고, 오는 까마귀 가는 까마귀 다 쪼아먹게 하거라.” 어머니는 지금도 이 지독한 욕설을 가슴 아파한다. 민망했던 나뭇꾼들과 아낙들은 돌아갔지만, 이듬해 잊지 않고 나물과 파를 이고 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어머니는 감격하여 비단을 나눠 주었다. 그런 최분이가 또래와 동생들을 데리고 제일 즐겨했던 놀이는 ‘칙칙 폭폭’이다. 술래에게 벌칙으로 장작이나 땔감을 하나씩 가져오게 하여 많이 모이면 ‘칙칙 폭폭’ 하면서 혼자 사는 병들고 외로운 노인 댁에 전달하는 놀이였다.
동네의 큰 처녀 일꾼, 21세 나이로 수녀원에 입회 추석 명절이면, 고운 명절 빔이나 친구집 마실, 이웃 동네 총각들 숨은 비화 얘기에 정신이 홀딱 빠질 나이의 최분이 처녀는 친구들을 꼬셔 이불 호청을 뜯어서 이층 턱에 무대를 꾸몄다. 동네 어른들을 다 모셔놓고 친구들과 동네 동생들과 꾸민 연극, 무용, 노래 등으로 경로잔치를 베풀면서 한편으로는 수제비를 만들어 대접할 생각에 절로 기뻐지는 최분이였다. 그러던 그녀는 1959년 5월 5일 예수성심 시녀회에 입회하게 된다.
나환자가 준 가지색 밥 1970년 안동교구 봉화 천주교회에서 수녀로 사도직을 수행하게 된 그녀. 그 무렵 경북 봉화군 나환자 정착마을에서의 일이다. 공소회장 강노렌조는 수녀님 밥사발 뚜껑에 자기 상처에 바르는 약을 슬쩍 발라 두었다. 수녀님의 사랑과 관심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때마침 이곳을 방문한 파리외방 라송도 신부와 식사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밥뚜껑을 연 최분이 수녀. 그리고 가지색으로 변한 밥…. 순간 수녀님은 조용히 밥그릇을 상 밑에 내려놓고 가지색으로 변한 밥 위를 걷어 내고는 태연하게 그 밥을 다 먹었다. 라 신부님은 놀랐고, 강 회장은 감격했다. 그후 강 회장은 최분이 수녀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다고 한다.
소피아 수녀와 마더 데레사 1978년 인도의 마더 데레사가 한국에 세운 ‘사랑의 선교회 수도원’은 삼선교에 있었다. 그리고 첫 수사로 입회한 성 나자로 수사는 뇌성마비였다. 그 수사는 첫 서원을 앞두고 장애인에 대한 현실 속의 냉대를 못 이겨 큰 갈등에 빠져 있었다. 소피아 수녀는 말없이 나환자 재가 복지현장에 그를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결국 그는 허원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무언가 마음에 좋은(?) 충격을 받고. 이 사실을 나중에 들은 총장인 앤드류 신부의 주선으로 평소 무척이나 존경하던 마더 데레사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는 소피아 수녀의 소망이 이루어진다. 마더 데레사가 친필로 ‘언제든지 오시면 순회 방문을 멈추고라도 기다리겠습니다’며 초청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1979년, 캘거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소피아 수녀는 마더 데레사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만남의 시각. 각국에서 축하하러 온 귀빈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자리에서 둘은 뜨거운 포옹으로 만났다. 그리고 마더는 40분이라는 긴 시간으로 환대를 했다. 꼭 한번 기회가 있으면 소피아 수녀가 하는 일을 보러 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대구 교구장이 정식으로 초청, 마더 데레사가 한국을 방문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0년 5월 4일. 많은 큰 수도회에서 모시기를 갈망했으나 마더 자신이 ‘소피아 수녀님 방에서 자고 싶다’고 하여 초라하고 지네가 나와서 위험하기까지 한 방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이튿날 구름처럼 밀려드는 인파들! 특히 기자들의 극성은 대단했고, 앞에 늘어서 있는 장애인들이 탄 휠체어를 짓밟고 올라서서라도 사진 찍기에 혈안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의 강연이 이어졌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누구를 보러 오셨습니까? 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보러 오셨습니까? 여러분이 먼저 찾아야 할 사람은 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대구 최초의 무료급식소 최분이 수녀는 알콜 중독으로, 행려자로 아무데나 쓰러져 얼어죽거나 병든 사람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무료급식소 할 만한 자리가 없을까? 그래서 찾아낸 곳이 교동시장의 2층 허름하고 비가 새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폐가였다. 만류하는 수녀원 장상들을 설득시킨 그녀는 단신으로 그 집에서 숙식하면서 폐가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장마가 지면 큰 고무통 여러 개를 방에 놓고 자야 하는 기막힌 지붕. 겨우 비바람만 막은 무료급식소. 처음엔 무료로 밥을 준다니까 믿지 않더니 나중엔 하루 400~500명의 인파가 몰렸다. 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기적처럼 매일 양식이 충당되었다. 아무도 모르게 첫새벽에 쌀, 생선, 헌옷가지, 콩나물을 문 앞에 놓고 가는 의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열두 광주리의 기적은 매일 매일 계속되었다. 양파, 쌀, 시래기 등 온갖 식품을 용달차에 싣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왕초 수녀와 빨간 모자 강호 “나, 6만 원만 도고.” 부랑자들 중 험하고 대가 세고 모두들 두려워하는 강호가 5년만에 수녀에게 말했다. 수녀들도 평시 ‘강호 왔다, 강호 왔어요’하며 두려워하였고, 소피아 수녀도 사실 좀 겁이 나 좀체로 말을 걸지 않았던 그가 돈을 달라는 것이다. “와?” “내 배 탈 건데 잠시 방값이 필요하다.” “안돼.” “와 안돼나! 다고! 내는 내 한 말에 꼭 책임을 진다!” 분위기가 금세 험해졌다. “나도 내 말에 책임을 져. 안 되면 안 되는 거야.” 말이 반복되었다. 강호의 눈초리가 달라지고 독기가 품어져 나왔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녀가 지면 제2의 강호, 제3의 강호가 오고 모든 부랑아가 피해를 본다. 강호는 수녀를 몰아붙였고, 주전자의 우유(당시 우유를 마련해 놓았었다)를 질질 부으며 험한 모습으로 소리 질렀다. 진퇴양난 절대절명의 분위기였다. 바로 그때, 순경이 들이닥쳤다. 한쪽에서 뒤늦게 식사를 하던 할머니 네 분이 계셨는데 그중 한 분이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사실 파출소에 신고는 안 하는 게 원칙이었다. 감옥에 가거나 훈방으로 금방 풀려나거나 바람직한 건 없으므로. “빨간 모자가 누구요?” “……” “당신은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긴장감이 돌았다. “아파서 약 달라는 거예요” 그녀도 모르게 입에서 그 말이 튀어 나왔다. 순경은 돌아갔다. 그리고 빨간 모자는 그녀의 신발 밑에 지긋이 밟혀 있었다. “엄마!” 덩치 큰 건장한 남자가 수녀님 치마폭에 쓰러져 통곡하며 무너졌다. 어릴 적 구박하던 계모를 떠나 사랑이란 걸 모르고 살아온 남자가 엉엉 울며 엄마를 불러댔다. 수녀도 눈물이 하염없이 솟구쳤다. “왜 나만 모르는 척 말도 안 붙였소. 딴 사람은 조금만 다쳐도 약을 발라 주면서 나는 아무리 많이 다쳐도 왜 약도 안 발라 줬소? 왜? 나도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어.” 수녀는 미안하다며 같이 울었다. 그날 강호의 눈에서는 눈물이 철철 흘러 강을 이룰 정도였다.
골칫거리, 알콜 중독 해결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알콜 중독자들이었다. 술에 취하면 폭군이요, 술이 깨면 너무 선해 슬프기까지 한 젊은이들. 그들이 멍든 영혼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늘 가슴이 아려왔다. 술이 없고, 물이 흐르고, 조용한 곳. 그런 곳은 없을까? 술만 없다면 치유하지 못할 것도 없잖은가? 늘 그 생각을 하며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마침 한 가톨릭 신자가 경북 성주의 산속에 있는 임야를 3만 평이나 기증했다. 기가 막히게 모든 조건이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1994년 5월, 수녀 한 명과 알콜 중독자 4명을 데리고 이 산골로 들어왔다. 최분이 수녀의 생각이 맞았다. 술집은 너무 멀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술이 되어 갔으며, 정성스런 세 끼의 밥과 약간의 노동은 삶에 활력을 주었고, 신선한 공기, 사시사철 기막힌 자연은 사람을 고요함에 익숙하게 이끌어 주었다. 자연히 술의 독이 걷혀가고 건강한 혈색을 돌려받았다. 소문에 소문이 퍼져 한 명 두 명 식구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이들과 지천으로 깔려 있는 산의 돌을 줍고, 건축 폐자재를 모아 집을 지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돌집. 술 먹고 죽어가던 그들이 힘을 모아 성모당도 세우고, 성당도 짓고, 수녀원도 지었으니 그들 자신도 자신들의 능력에 놀랐다. 물론 40여 년 목수생활을 하다 들어왔다는 요셉 씨와 건축회사 사장인 최분이 수녀의 오빠 도움이 컸지만….
산골의 저녁은 일찍 찾아왔다. 낮에 봉사자들이 담근 김장김치를 찢어 뜨끈한 밥에 얹어 먹은 후 그들은 7시에 모여 앉아 기도를 올렸다. ‘하늘에 계신…’ 보답을 하는 것이다. 사랑을 준 사람들을 위해. ‘저는 늘 수녀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고 싶어요’ 했던 주방의 아줌마도 보이고, 도마도, 요셉도, 수녀님들도 보이고, 모두 보인다. 이제 70여 명이나 되는 식구들은 자신들의 기도 가락을 옆사람에게 맞춰가며 하모니를 이룬다. 곧 별은 총총 뜰 거고, 이들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낸 하루를 접으며 무욕의 하루를 주신 분께 감사를 한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내일이 또 올 것이므로…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 보라. 이 도시 저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라 저마다의 의미를 채우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의미를 하나 하나 채워 나가지 않으면 어떤 화려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마침내 빈 껍질로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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