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시성(詩聖) 릴케의 동화에 ‘죽음 이야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 어떤 곳에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고독의 경지를 체험하기로 결심하고 황야 한가운데 출입문이 각각 따로 있는 아담한 집을 지었습니다. 릴케는, 아침이 되어 문을 열면 풍경들과 빛과 어깨에 향기를 멘 바람이 줄을 이어 이 황야의 집을 방문했다고 묘사했습니다. 이런 행복한 나날이 얼마쯤 흘러간 어느 날, 남자의 문 앞에 낯선 방문객이 나타났습니다. 남자는 무심코 문을 열려다 말고 그 방문객이 죽음이란 것을 알고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방문객은 여자의 문으로 갔습니다. 여자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고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죽음이 여자에게 다가가서, “이것을 남자에게 주시오” 하며 작은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한 개의 씨앗이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말하지 않고 씨앗을 뜰에 심었습니다. 봄이 되자 씨앗에서는 싹이 나고 검붉은 꽃이 피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누구도 그 꽃의 유래에 대해서 말하거나 묻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 두 남녀는 죽음을 만난 후에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죽음의 씨앗을 받은 그 순간부터 이미 죽음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영생은 네 마음 속에 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는 살았다하나 이미 죽은 것이다” 하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이의 삶을 산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죽음보다 더 억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도의 한 스승이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죽으면 자기도 죽겠다며 스승과의 이별을 애석해 했습니다. 그 때 스승이 말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는 법이다. 꽃을 보아라. 플라스틱 꽃만이 죽지 않는 것이니라.”
근래에 내 주변에는 전에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음과 같은 삶을 살다가 막상 죽음이 임했을 때는 맞을 준비도 안 된 채 임종을 맞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 죽음 앞에서, 흔히 “내가 왜?” 하고 분노하거나, 가망 없는 생명에 대해서 지나친 집착을 가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입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에 대한 다른 면이라는 말입니다. 고은 시인의 시의 한 구절처럼 우리의 삶은 죽음을 껴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이 바르면 죽음이 두렵지 않고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으면 삶에 평화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즈의 문을 여는 도로시와 같이, 두려움보다 기대를 가지고 그 문 앞에 서는 용기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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