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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삶 한 달 동안의 휴가 백진만

한 달 동안의 휴가

위기에 닥쳐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시간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흐르지만,
사랑은 늘 우리를 용서와 화해로 되돌려 놓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큰 병원에 한번 가 봐요. 병 키우지 말고.” 소주잔을 꺾으며 후배가 내뱉었다.
“병은 무슨. 그냥 좀 심한 감기 몸살이지. 사람이 죽으려면 보약 먹고 몸 챙기다가도 교통사고로 가는 거야. 팔자대로 살다 가는 거지, 뭐.”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상하긴 이상했다. 내일은 이비인후과를 한번 가 봐야지. 사실 몸이 아픈 건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보다는 어려워진 사업이, 부쩍 자주 다투고 서먹해진 아내와의 관계가 더 힘이 들고 고통스러웠다.
다음 날 찾은 이비인후과에서는 편도선염이라고 했고 약을 먹은 후 거짓말처럼 열이 사라졌다. 그러나 처방해 준 약을 다 먹은 날 다시 열이 나기 시작하며 식은땀이 났다. 약을 먹을 땐 거짓말처럼 멀쩡하다가도 약이 떨어지면 다시 열이 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12월의 어느 날. 그날도 약을 받아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참으로 엉뚱하게도 이런 현상이 운동 부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텅 빈 사무실에서 맨손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앉았다 일어섰다 반복하기를 40번쯤, 갑자기 어지러워서 바닥에 쓰러져 잠시 정신을 잃었다. 한 2~3분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았는데 누군가에게 왼쪽 뺨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았다. 극도의 긴장감이 밀려왔다. ‘중풍이 온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 애들 엄마한테는 또 뭐라고 말하지? ’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내 나이 이제 마흔 하나. 병은 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이제 현실이 되는 걸까. 막연한 두려움에 건강검진 한 번 제대로 받아 보지 않은 내가 후회스러웠다. 모르는 게 약이라며 떠들던 오만함이 비겁하게 도망치고 있었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필요한 사람
다음 날 오후 서울아산병원을 찾았고,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은 원인불명의 열이라며 감염내과로 가보라고 했다. 사실 나는 감염내과가 있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입원하셔야 됩니다. 감염성 심내막염입니다.” 감염내과 우준희 교수님이 말했다.
“그게 뭔데요? 꼭 입원해야 하나요? 그냥 약으로는 힘든가요? ”
“환자분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줄 모르시나 본데 지금 웃을 때가 아니에요. 심장 판막이 세균에 감염되어 균 덩어리가 붙어 있어요. 잘못해서 그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 뇌혈관이라도 막으면 죽을 수도 있어요. 4주 동안 입원 치료해야 하고, 심하면 수술해서 균 덩어리를 제거해야 해요. 예전 같으면 100퍼센트 죽는 병이에요.”
만약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삶과 죽음이 너무 쉽고 허망하게 들렸다. 병원 문을 나서면서 애써 담담하게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빨리 집에 와….” 말끝의 떨림이 느껴졌다.
고마웠다. 아내의 마음속에 진심으로 내가 필요한 사람임이 느껴져 왔다. 그래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렇게 위기는 다시 하나가 되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나는 입원했다. 열은 계속됐고 힘들었지만 묘하게도 마음만은 편했다. 골치 아픈 사업적인 일에서 잠시나마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그동안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열나고 머리 아픈 거 빼면 내가 어디 환자야? 혼자 걸어 다닐 수도 있고 밥도 잘 먹고 다하는데. 그냥 휴양 차 어디 여행 온 거 같아. 그러니 애들만 두지 말고 집에 가. 당신 여기 있으면 당신도 병 나.”
“내 걱정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오늘은 첫날이니까 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나도 당신 아프다고 생각 안 해. 같이 특별한 여행 온 거 같아.” 아내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고 오랜만에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무서운 ‘감염성 심내막염’
입원과 함께 본격적인 검사가 시작되었고 채혈은 내가 퇴원하는 그날까지 매일 진행되었다. 마침내 5일째 되던 날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심이 가던 원인 균을 찾았고요. 오늘부터 4시간 간격으로 항생제 치료가 시작될 거예요. 심장 판막에 붙어 있던 균 덩어리 중 일부가 떨어져 나가 뇌혈관을 막아 뇌경색이 온 겁니다. 문제는 나머지 큰 덩어리예요. 수술해서 제거하는 방법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혹시 모를 상황에 불안감이 밀려왔고 막다른 골목에서 찾게 된다는 절대자를 나도 모르게 찾고 있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모두 나에게 닥칠 것처럼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마침 6인실 창가 쪽에 자리가 비어 병실을 옮기게 되었다. 병실의 분위기는 의외로 밝았다. 오랜 투병 생활로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그것 말고는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해주는 모습이 한 가족 같았다. 몇 분 전의 불안감은 자취를 감추고 이 모든 상황이 내게 겸손과 감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부족함이 주는 감사의 의미를 실감하고 있었다.
항생제 치료가 시작되자 열도 사라지고 몸도 가벼워졌다. 창 밖에는 조용히 함박눈이 내리고 오후 늦게 아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마침 담당 선생님이 들어와 수술 날짜가 잡혔다고 알려 주었다.
“수술하면 인공 판막을 달아야 하는데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동물성 판막으로 10년 정도 쓰면 다시 갈아야 해서 보통 나이 드신 분들에게 많이 권하죠. 두 번째는 기계 판막으로 이것은 영구적이에요. 그런데 이 기계 판막은 몸에서 적으로 인식해 공격을 하기 때문에 와파린이라는 약을 평생 드셔야 해요. 음식도 많은 제약을 받아요. 아마도 젊으시니까 기계 판막으로 하실 거예요.”
아내와 나는 순간 멍해졌다. 매 순간 새로운 의학적 지식은 당혹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심장에 이물질을 달고 평생을 살아야 하다니, 아니 그보다 약 없이는 살 수 없다니. 선생님이 나가고 아내와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피곤함이 밀려왔다.
“피곤해. 나 좀 자야겠어.”
한 시간 남짓 잠이 들었나 보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아내는 안쓰러운 듯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잤어? 당신 자는 모습 보며 많이 생각했어. 모든 게 잘 될 거야. 당신 수술 받고 나오면 우리 네 식구 행복하게 살자. 그동안 내가 짜증내고 못되게 군 거 미안해. 산다는 게 지겨울 때가 있잖아. 아마 똑같은 일상에 내가 지쳤나 봐. 이제 아프지 마!”
아내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곱게 잡은 아내의 손끝에서 사랑이 느껴졌다. 마음이 평화로웠다. 수술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고 신기할 정도로 아무 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신이 주신 육신의 고통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지만 사랑은 늘 우리를 용서와 화해로 되돌려 놓는다.

3일 동안 긴 잠에 빠져
수술 전날 밤 아내와 나는 흉부외과 중환자실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동의서를 들고 우리에게 다가와 수술 중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황과 후유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돌아서는 아내가 “그동안 괜찮았는데 막상 동의서 쓰니까. 불안하고 겁이 나”하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술 당일. 이동식 침상에 누워 수술실로 향하는 복도의 형광불빛은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아내는 내 손을 꼭 붙들고 애써 밝게 웃어 주었고 잠시 후 문 사이로 아내는 꿈처럼 멀어져 갔고 이후 나는 3일 동안의 긴 잠에 빠져 들었다.
“정신이 좀 드세요? ”
간호사의 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움직이려 했으나 팔 다리가 침대에 묶여있음을 깨달았다. 인공호흡기로 숨을 쉰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줄 미처 몰랐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내가 완전히 살아있음의 반증이기도 했다.
“보호자 분들 다녀가셨는데 기억나세요? ”
꿈처럼 아내와 부모님, 장인, 장모님이 나를 부르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보고 간호사는 큰 소리로 말했다.
“수술이 아주 잘 됐어요. 환자분이 아주 잘 견디셨어요. 여기는 중환자실이고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목이 메어왔다. 감정이 복받쳤다. 고통 중에 오는 이 희열은 슬픔인 듯 아닌 듯 감정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꿈처럼 멀어져갔던 아내의 모습이 꿈처럼 다가왔다.
“지운 아빠. 이제 정신이 들어? 고생했어. 당신 기계 판막 안 넣었대. 판막성형으로 수술했대. 평생 약 먹고 살지 않아도 된대. 고마워.”
아내는 울먹이고 있었고 내 혀끝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이 맴돌고 있었다. 나는 4일 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올라왔다.
“수술이 아주 잘 되었어요. 이제 툴툴 털고 집에 가야지? 심장외과 이재원 교수님이 신경 많이 써주셨어요.” 우준희 교수님이 밝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아마 젊은 놈 심장에 기계 판막 넣으려니 불쌍해 보였나 봐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회진을 오신 우 교수님과 농담 섞인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입원한 지 꼭 한 달째 되던 날 나는 병원 문을 나섰다. 1월의 거리는 제법 쌀쌀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한 달 동안의 휴가가 이제 끝났군.” 무심히 던진 나의 말에 아내는 조용히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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