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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9일 저녁 8시,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는 뜻 깊은 음악회가 열렸다. 나와 이화여대가 큰 은혜를 입은,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를 기리는 추모 음악회였다. 음악성이 높은 폴란드의 음악가들이 직접 내한해 좋은 연주를 들려줘 더욱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정주영 레퀴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진혼교향곡’은 기독교적 사상에 입각해서 작곡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적인 내용이 포함됐으면 재단 설립자와 더 잘 맞았을 것이고, ‘심판’보다는 ‘평화’의 분위기가 조금 더 들어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설립자를 회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연주를 듣는 동안 설립자를 떠올렸다. 수줍음 많은 소년 같은 그 분의 미소, 꾸미지 않는 소탈함, 핵심을 정확히 짚는 통찰력,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채우려는 끝없는 호기심을 지니셨던 분…. 그 분과 나는 같은 하동(河東) 정씨(鄭氏)라는 작은 연결고리가 있다. 그러나 내가 그 분을 생각하는 것은 이런 사소한 인연 때문이 아니다. 1980년대 초부터 돌아가실 무렵까지 아무 보답을 바라지 않고 이화여대에 베풀어주신 사랑 때문이다. 그 은혜를 어떻게 해야 갚을 수 있을까.
첫 만남에서 도서관 지어달라고 부탁 1981년인가, 82년인가…. 연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설립자를 처음 뵌 건 1월 중순, 롯데호텔에서 열린 현대그룹 주최 신년하례 만찬이었다. 외국 대사들과 경제인들 그리고 유창순 전 총리 등이 참석한 자리였다. 그날 내 자리는 설립자 옆이었다. 설립자를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평가이지만, ‘대한민국 최고 부자답지 않게 소박하고 좋은 분’이라는 첫인상을 받았다. 많은 얘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그릇이 굉장히 크고 휴머니티가 강한 분이라는 느낌이 전해졌고, 직접 가난을 겪어봐서인지 없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한한 일은, 설립자는 초등학교만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외국 대사들이 하는 영어를 잘 알아듣는 것이었다. 외국인들과 어울려 있어도 하나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외교관들도 설립자를 굉장히 좋아했다. ‘참 머리가 좋은 분이구나’라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이화여대 총장에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김옥길 선생님의 후임이었다. 총장을 맡고 보니 학교 금고가 텅 비어 있었다. 할 일은 많은데, 여력은 없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마침 옆에 앉은 ‘대한민국 최고 부자’가 인품마저 훌륭한 분 같아서 나는 당돌한 부탁을 드렸다. 요즘 같아서는 그런 부탁을 못 드렸을 테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젊었다. 그 무렵 이화여대에 가장 시급한 건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은 ‘대학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존의 도서관은 너무 빈약해서 늘 마음이 안 좋았다. 미국의 권위 있는 교수가 새 도서관의 설계를 맡아 주었는데, 그 도면대로 건물을 지으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만한 돈이 이화여대에 있을 턱이 없어서 설립자에게 “도서관을 현대에서 싸게 지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그러자 설립자는 너무나 시원시원하고 선선하게 수락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벽돌집을 짓는 값으로 돌집을 지어 주겠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이화여대가 멋진 석조 도서관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꼭 밝히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설립자에게 부탁을 참 많이 드렸다. 대부분 이화여대에 건물을 싸게 지어 달라는 청이었다. 그래서 현대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했다. 그런데, 설립자는 내가 부탁의 손길을 내밀 때마다 단 한 번도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다. 항상 대학 총장인 내 자존심을 살려 주셨다. 개인적으로는 이 은혜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약자에 대한 배려 때문에 이화여대 지원 도서관 신축을 계기로 나는 설립자를 자주 찾아뵈었다. 이유는 한결같았다. 학교 건물의 증축이나 신축 부탁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광화문 사옥으로 갔다가 다음에는 계동 사옥의 설립자 집무실로 찾아갔다. 설립자는 늘 귀찮은 부탁을 드리는데도 선선히 잘 들어주셨고, 내가 돌아갈 때는 늘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그리고 이병규 당시 비서실장은 내가 차를 타는 곳까지 따라 나와 인사를 했다. 생각할수록 참 고마운 분들이다. 설립자의 넓은 국량 덕에 이화여대에는 좋은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종합과학관, 아름다운 건물인 박물관, 법정대학관, 100주년 도서관 증축 부분, 충청도의 고사리수련관, 이화학당 법인관, 하늬솔빌딩, 충정빌딩 그리고 목동병원…. 이 건물들을 모두 현대에서 저렴한 값으로 지어준 것이다. 이화여대에는 ‘헬렌홀’, ‘김활란홀’처럼 학교와 관계된 인사의 이름을 붙인 건물은 있지만, 외부인사의 이름을 그것도 건물에 동판으로까지 새겨 붙인 건물은 ‘아산관’이 유일하다. 공과대학인 ‘아산관’이 탄생한 데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다. 우리 학교에 여자대학으로선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과대학을 만들 때였다. 공대 건물이 필요했던 이화여대는 또 설립자를 떠올렸다. 당시 이화학당 이사장이었던 나와 내 후임인 윤후정 총장이 총대를 메고 설립자를 찾아뵈었다. 설립자를 만난 자리에서 윤 총장이 대담하게도 “공과대학은 의미도 큰 건물이니 싸게 지어주시기보다 아예 통째로 지어서 기증해 달라”고 청을 넣었다. 그러자 설립자는 껄껄 웃으시며 “그러자”고 선선히 수락하셨다. 그러면서 “서울대는 국가가 지원하고, 남녀 종합대는 돈 잘 버는 남자 동창들이 도와주지만, 후원자가 마땅치 않은 이화여대는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고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 주셨다. 설립자와 헤어져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윤 총장이 “‘공짜’ 얘기를 꺼내는데 등골에서 식은땀이 쭉 흐르더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윤 총장도 속으로는 상당히 긴장했던 듯하다. 공과대학이 완공됐을 때 우리는 건물을 ‘아산관’이라고 명명하고 설립자 동판을 만들어 붙이는 것으로 설립자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자 했다. 이화여대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유별난 학교여서 감사 표현을 잘 못 한다. 건물명을 설립자의 호인 ‘아산관’으로 하고 동판에 새겨 건물에 붙인 것만 해도 딴에는 대단한 감사 표시였다. 설립자가 이화여대를 지원해준 것은 그 분의 휴머니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을, 인간 중에서도 특히 약자인 여성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간적인 휴머니즘 때문에 설립자는 이화여대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강한 통찰력과 어마어마한 결단력 이화여대는 1986년에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설립자에게 무엇으로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까 고민하다가 우리는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설립자는 시인 구상과 모윤숙, 방송작가 김수현 씨 등 문인과 친분이 두터울 뿐 아니라 설립자 스스로 문학적 소양이 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학위 수여식을 하던 날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이건 이 자리에서 처음 밝히는 얘기 같다. 학위 수여식은 이화여대 대운동장에서 열렸다. 당시는 재벌에 대한 학생들의 반감이 무척 많을 때였다. 내가 수여문을 읽어 내려가는데 학생들이 “우” 하는 고함을 지르면서 소요가 일었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뒤에 앉아 있던 김옥길 선생님이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계속 읽어라”고 하셨다. 수여식이 끝난 뒤 내가 설립자를 총장 공관으로 모시고 가고, 또 후문을 통해 학교를 떠나실 때까지 줄곧 설립자 곁을 따라다닌 적이 있다. 산전수전 다 겪으신 설립자께서야 전혀 당황하지 않고 초연하셨지만, 혹시라도 위해를 당하시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설립자를 대하는 사람은 세계관이 좁은 사람이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원시인에 대해 연구한 학생이 있었다. 그 연구 결과는 ‘원시인은 지식은 없어도 통찰력이 높다’는 것이었다. 내 어머니 경우만 해도 초등학교도 못 나왔는데 참 지혜로우셨다. 할아버지의 소망은 아들, 그러니까 내 아버지가 면장을 한번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아버지가 산골마을로 면장을 가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셨다. 그 산골로 들어가면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남편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아내가 반대한다는 것이 용납될 수 없던 시절이었는데…. 어머니의 지혜로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설립자도 통찰력이 강했고, 어마어마한 결단력을 지니셨다. 서산농장에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물막이 공사를 한 ‘유조선 공법’ 얘기를 듣곤 독창적인 상상력에 깜짝 놀랐다. 만나 뵐 때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보다 머리가 좋고, 늘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 분이라는 신선한 인상을 받았다.
지친 사람을 그늘에서 쉬게 하는 거목(巨木) 1998년, 설립자가 소떼를 몰고 북한 땅을 밟은 ‘소떼 방북’만 해도 그렇다. 그게 얼마나 큰 사건인가. 설립자가 몸이 불편하실 때였는데도 그런 일을 하셨다는 건 늘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생각을 많이 하신다는 반증일 것이다. 북한을 다녀오신 뒤 설립자의 방북과 무사귀환을 축하하는 모임이 열렸다. 그때도 내가 설립자 옆에 앉았는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설립자께서 내 귀에 대고 “김정일이가 말이야, 머리가 참 좋더라고요”라는 말을 하셨다. 나는 설립자가 어떤 행사에 오라고 하시면 늘 참여했다. 설립자의 은혜를 갚을 길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립자의 청을 하나 들어드리지 못한 게 있다. 한번은 설립자께서 우리 재단 사무실로 오셨다.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셨을 무렵이었다. 설립자는 나보고도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런데 이화여대는 ‘총장은 정치에 참여 안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런 원칙을 들어 완곡하게 사양했더니 웃으시면서 돌아가셨다. 이 청을 못 들어드린 것이 어떤 면에서, 늘 안타까웠다. 언젠가 ‘티베트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등산가가 티베트에서 보낸 경험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영화에서 등산가에게 ‘왜 등산하느냐?’고 물으니까 ‘산에서 맡을 수 있는 순수함이 좋아서 산에 오른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설립자에게서 그런 순수함을 보았다. 오만 가지 일을 다 겪었으면서도 참 순수한 분이었다. 참 좋은 분이고, 큰 분이었다. 특히 자신의 가난 경험 때문인지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열정이 아주 강했다. 그 분을 생각하면 공부를 많이 했다고 꼭 유익한 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인 정주영, 인간 정주영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나는 ‘거목(巨木)’이라고 하고 싶다. 많은 사람을 그 그늘에서 쉬게 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그 분이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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