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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아산의학상 수상자 그에게서 한국의학의 미래를 본다 김상훈

그에게서 한국의학의 미래를 본다

2002년 대한의사협회는 노벨의학상에 근접한 한국인 의사 20명을 선정했다. 그 가운데 울산의대 신경과학교실의 고재영 교수가 들어있었다. 고 교수는 2006년에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과학기술부)가 선정한 ‘국가석학’에도 포함됐다. 국가석학이란, 말 그대로 국가에서 인정한 과학자다. 그런 고 교수에게 최근 또 하나의 상이 주어졌다. 상금만 자그마치 2억 원에 이르는, 국내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아산의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성과들을 거뒀기에 그가 이토록 화려한 경력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이 궁금증은 고 교수를 만나고 난 후에야 풀렸다. 실마리는 ‘아연’이었다.

뇌졸중 원인 밝힌 새로운 발견
지난해 4월, 고 교수는 뇌신경과학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지로 평가받는 ‘저널 오브 뉴로사이언스’에 논문을 게재했다. 뇌 속의 아연이 신경세포를 죽인다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논문이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2005년 6월 고 교수는 ‘네이처 리뷰 뉴로사이언스’에 ‘아연이 건강과 질병 발생에 미치는 영향’이란 주제로 논문을 실었다.
전문 과학자가 아니라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화학원소 아연이 문제라는 사실밖에는 말이다. 쉬운 설명을 부탁했다. 고 교수가 입을 열었다.
“1994~1995년 미국에서 공부할 때 쥐를 대상으로 동물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쥐가 뇌졸중(뇌허혈)을 일으켰을 때 아연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테스트한 거죠. 뇌졸중이 생길 때 아연이 분비돼 신경세포를 죽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때 연구결과를 과학저널인 ‘사이언스’에 발표했죠.”
아연이 뇌의 신경세포를 죽인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고 교수는 뇌졸중이 발생했을 때 신경세포가 죽는 초기 과정에서부터 아연이 축적된다는 사실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알아냈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저널 ‘사이언스’에서도 그의 논문을 채택하였다. 사실 그의 발견이 있기 전까지 신경과학자들은 모두 칼슘이 신경세포 안으로 들어가 죽이는 것이라고 믿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칼슘이나 아연이나 거기서 거기다. 그러나 과학자들에게는 천양지차다.
병의 원인을 바로 알아야 효과적인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쯤 본격적인 치료제가 나올까. 고 교수는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고 대답했다.
“만약 사람이 자동차에 치어 사망했다면 여러 원인이 있을 겁니다. 뇌출혈, 장기파열 같은 것이겠죠. 이런 원인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순서대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가장 먼저 발생하는 원인을 차단한다면 나머지 원인도 없을 테고, 사망하지도 않겠죠. 현재는 뇌졸중이 발생할 때 아연이 작용한다는 것을 밝혀낸 단계입니다. 앞으로는 아연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하나씩 밝혀야겠죠. 우리가 연구를 더 명확히 해내면 치료제도 개발될 겁니다.”
 요컨대 치료제 개발은 아연의 작용을 지금보다 더 명확하게 밝힌다면 부수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치료제 개발을 언제까지 하겠다고 시한을 정하지는 않았다.
사실 아직까지는 칼슘이 신경세포를 죽인다는 이론이 신경과학계에서는 주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 교수의 아연 이론이 각광을 받고는 있지만 주류가 되려면 넘어야 할 관건이 많다. 고 교수는 인간에 가까운 영장류를 대상으로 실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연구는 쥐 실험 단계입니다. 쥐와 사람은 많이 다르죠. 그러나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도 없어요. 원숭이 같은 영장류를 대상으로 실험을 해야죠. 지금까지는 이런 실험을 할 수 있는 기관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없었습니다. 다행히 최근 미국 애틀랜타의 에모리대에서 영장류 실험센터를 가동했습니다. 그 곳에서 2~3년 안에는 연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초의 노벨의학상 기대하는 ‘국가석학 의사’
고 교수는 ‘근거중심’ 의학의 신봉자다. 과학적 근거가 없다면 환자에게 치료법을 권하지 않는다. 그동안의 연구결과만 봐도 그가 얼마나 과학적 근거를 따지는지 알 수 있다. 다른 과학자들은 평생 한 번도 논문을 게재하기 힘들다는 ‘사이언스’에만 제 1저자로 3편, 책임저자로 1편, 공동저자로 2편 등 총 6편의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을 포함해 1986년부터 현재까지 총 113편의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 이 가운데 제 1 또는 책임저자로 올린 논문만 60편이다.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이 고 교수의 논문을 인용하는 횟수도 1만 회에 가깝다.
국내 과학자 가운데 이런 학술성과를 거둔 이는 거의 없다. 고 교수를 노벨의학상에 근접한 의사로 부르는 것도 이런 성과 때문이다. 아연의 신경세포 사멸 기전이 더 확실해지고 신경과학계의 주류가 된다면 노벨의학상 수상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그러나 고 교수는 손사래를 쳤다.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노벨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예만 보더라도 논문인용 1만 회가 넘는 과학자들이 한 학교에 여러 명이 있어요. 더 많은 연구가 국내에도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런 점 때문일까. 고 교수는 서울아산병원을 진료만 잘 보는 병원이 아니라 연구를 많이 하는 병원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고 교수는 현재 아산생명과학연구소의 소장직을 맡고 있다.
고 교수는 스스로를 ‘연구하는 의사’라고 불렀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서의 그는 어떤 사람일까. 보수적인 의사란다. 약도 꼭 필요한 것 아니면 쓰지 않는다. 일부러 환자에게 낙관적인 말을 골라 쓰지도 않는다. 웃는 의사를 환자들은 바란다. 그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 교수는 감정을 감추고 말을 아낀다. 왜 그럴까.
“뇌경색으로 심한 마비증상이 있는 환자에게 ‘괜찮다. 곧 낫는다’고 희망을 주는 게 환자 가족으로서는 당장 기분이 나아지겠지만 결과가 반대가 된다면 어떨까요? 의사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물론 희망을 없애는 것은 옳지 않죠. 그러나 억지로 희망을 가공하는 현재의 풍토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서울아산병원을 연구중심 병원으로 만들겠다는 ‘연구하는 의사’, 환자에게 정직하겠다는 ‘보수적인 의사’, 최초의 노벨의학상을 기대해볼 수 있는 ‘국가석학 의사’…. 의료계는 지금 고 교수에게서 국내 의학의 미래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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