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큰 병원 원무과 앞에서 몸피가 자그마한 노인 부부를 보았다. MRI 검사비용을 미리 내야 하는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창구 여직원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좀 감해 줘.” 앞줄 의자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조마조마했다. 할아버지가 무안을 당할까봐 걱정스러워서였다. 그러나 여직원은 활짝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할아버지. 그렇게 해드리고 싶지만 저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요.” “아, 그럼 거기 왜 앉아 있어. 세상에 에누리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건 정말 시골 영감이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실랑이가 붙었다는 노래 그대로였다. “얼마 있으신지 한 번 살펴보세요.” 그녀의 권유에 할아버지하고 할머니는 여기저기서 돈을 다 꺼내 세어보았다. “다 합해도 5만원이 모자라.” “그럼 어떻게 하지요? 어디 전화하실 데 없으세요? ” 그녀는 전혀 짜증내지 않고 친절하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불쑥 말했다. “그러지 말고 있는 돈을 다 낼 테니까 나머지는 달아 놔.” 달아놓다니? 무교동 빈대떡 집도 아니고….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는 어마어마하게 큰 이 병원에 주눅이 들지도 않는지 그녀에게 애교 섞인 간청을 다시 했다. “아, 다음에 올 때 꼭 낼게 달아놓으라니까.” “할아버지. 그러지 마시고 아는 분에게 전화 드려보세요.” “그러려고 해도 공중전화도 안 보여.” “그러시면 전화번호를 주세요. 제가 걸어드릴게요.” “자식들에게 구차하게 걸기 싫어.” “할아버지, 자녀분들은 이럴 때 전화하라고 기르신 거예요.” 여직원이 웃으며 말하자 할아버지는 멋쩍으면서도 흐뭇한지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 “그럼요. 할아버지, 얼른 전화번호 주세요.” 할아버지는 마침내 전화번호를 내밀었고, 여직원은 그 곳에 전화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아드님이 금방 달려오신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된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할머니하고 안심하는 눈빛을 나누었다. “걔네들은 우리가 여기 온 줄도 몰라. 폐 끼치기 싫어서.” “보세요. 마구 달려 오신다잖아요. 다음엔 꼭 연락부터 하세요.” 할아버지는 파안대소하며 우리들을 돌아다보았다. “나, 서울서 이렇게 친절한 아가씨 첨 봤어.” 앞줄에 앉아 있던 우리도 모두 따라 웃었다. 그녀의 미소가 거기 있던 사람들의 근심과 괴로움을 잠시 어디로 보내버린 것 같았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한편 그것을 이겨내는 일로도 가득 차 있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정말 옳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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