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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쇠에 불어넣은 생명의 숨결 오윤현

지난 2월 말, 이경자(56·경기도 무형문화재 19호) 선생의 집으로 가는 길은 아직 겨울이었다. 연달아 펼쳐지는 무채색 풍경. 바람은 차갑고, 스쳐 지나는 들판과 나무는 온통 흐리터분했다.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기좌리 산자락 끝에 엎드려 있는 이 선생의 집도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어디선가 훌쩍 들이닥친 바람이 집 주위에 서 있는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든다.
“으, 추워” 소리를 내뱉으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확 바뀌었다. 작업실 겸 거실로 쓰는 공간이 봄날의 양지처럼 훈훈하고 고즈넉했던 것이다. 주위를 일별해 보니 벽에도 바닥에도 탁자에도 그녀의 작품이 즐비했다. 작품들은 손바닥만한 것부터 텔레비전 모니터만한 것까지 다양했는데, 하나같이 정교하고 화사하고 따뜻했다. 그녀가 ‘쇠를 주무르는’ 입사장(入絲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필경 나무나 돌을 다듬어 만든 작품으로 착각하리라.

2천 년 명맥 이은 전통공예
그렇다. 이경자 선생은 27년간 무채색의 차가운 쇠를 고상하고 화려한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왔다. 혹시 “입사장이 뭐지? ”라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최근 들어 입사라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고, 또 입사로 만든 작품을 보기 힘든 탓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입사는 거의 2천 년간 명맥을 이어온 우리의 전통공예 기법이다. 낙랑 출토 유물과 신라 고분의 유물에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입사는 한자 뜻 그대로 ‘실을 집어넣는 작업’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에 쓰는 실은 면이나 털을 꼬아 만든 게 아니다. 금이나 은 또는 청동을 가늘게 꼰 것이다. 이 실과 자그마한 금속 편(片)을 정 끝으로 홈을 파거나, 겉면에 가늘고 굵은 빗금을 그은 쇠에 상감하거나 붙이는 작업이 곧 입사다. 문양은 연꽃·당초·인동·기하학·빗살·점선·사군자·학·기린·거북·현무·삼족오 등 다양하다. 이경자 선생은 이 값진 공예를 1982년 처음 접했다. 중앙대 공예과를 나와 칠보 공예에 매달리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스승이자 문화재 전문위원인 김종태 교수(동양미술사)께서 “금속공예를 전공했으니 입사를 한번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 며칠 뒤 입사장 이학응(당시 82세) 옹을 소개받았고, 그 길로 서울 정릉 산꼭대기에 있던 이 옹의 집을 찾아 나섰다. 이 옹은 1910년 한·일 합방 뒤 대한제국이 세운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활동한 입사장 출신의 무형문화재였다(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는 입사장 외에도 나전칠기, 목공, 도금, 도자, 염직 분야의 장인들이 몸담고 있었다).
그러나 첫 대면은 문전박대였다. 꼿꼿한 외모의 이 옹은 “뭐라, 이 힘든 걸 배워. 어여 시집이나 가”라며 내쳤다. 하지만 이미 사전 학습으로 입사의 매력에 심취해 있었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이 옹의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을 찾아가는 날이 늘어났다. 물론 갈 때마다 헛되이 돌아오지 않았다. 눈치를 봐가며 어깨너머로 이 옹의 작업을 돌라보았다. 그때마다 이 옹은 비록 담배함이나 도장함 같은 작은 작업에도, 뇌 수술하는 의사보다도 더 세심하게 쇠와 은사(銀絲)를 주물렀다.

90년대 초 경기도 무형문화재 지정
40여 일 뒤, 마침내 이 옹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작품 한 가지를 만들어서 가지고 와봐라.”
이경자 선생은 당연히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작품을 창조했다. 그리고 결국 이 옹으로부터 “잘 만들었다”라는 칭찬을 들었다. 어려서부터 혼자 있고 뭘 만들기 좋아하는 심성이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그이는 이 옹이 작고하기 전까지 6년 동안 집을 무시로 드나들며 입사 기술을 몸으로 익혔다.
“처음에는 묵직한 쇠를 다루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만지면 만질수록 쇠가 부드럽고, 따뜻하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이경자 선생의 말이다.  그때부터 5~20kg에 달하는 쇠를 붙들고 늘어졌다. 때로는 무거운 쇠를 들고 낑낑거리는 모습이 애처로울 때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애정어린 핀잔도 건넸다. 어머니마저 “여자가 할 수 있는 곱고 아름다운 작업도 많은데, 왜 하필 쇠야. 어서 시집이나 가, 어서” 하고 퉁바리를 놓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낯선 도전에는 반대하면서도, 그녀가 만들어낸 입사 작품에는 열띤 찬사를 보냈다는 점이다. 타고난 손재주 덕인지, 이상하게 작품을 만들기만 하면 찾는 사람이 나타났던 것이다.
입사에 취해 있는 동안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낙엽이 지고 눈이 왔다. 그 사이에 그녀는 입사라는 찬란한 예술을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 부식되고 녹스는 쇠와, 반짝거리는 금·은·동을 따로 놓고 보면 별다른 감흥이 없다. 하지만 그 금속들을 섞으며 명암을 나타내면 사정이 달라진다. 유화나 수채화와 전혀 다른 느낌의 풍경화와 추상화가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 ‘과실’을 따려고 그녀는 틈만 나면 쇠를 오리고, 긁고, 굽히고, 꼬고, 문지르고, 두드렸던 것이다. “낮이고 밤이고 틈만 나면 작업을 했다. 심지어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새벽 두세 시도 마다않고 쇠를 만졌다”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그 덕에 그녀의 작품은 “꽤 현대적이다”라는 평을 듣는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과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문화체육부장관상 등, 상도 10여 차례 받았다. 중앙대·서울대 금속공예과에 출강했다.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다. 1990년대 초에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는 영광도 맛보았다. 매일매일 자기를 넘어서는 꾸준한 노력과 전통 문양을 더 단순화하거나 세련되게 표현한 덕이었다.

전통공예와 생활용품의 만남
또 하나의 성과는 수천 점의 작품 중에 똑같은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일기 쓰듯, 늘 새로운 것을 새겨 넣은 덕이다. 기하학적인 무늬, 형이상학적인 무늬, 물고기 무늬, 나뭇잎 무늬…. 요즘도 그녀는 새로운 무늬를 구상중이다. 그리고 그 무늬를 전통 공예품이 아닌, 일상 생활용품에 새겨 넣는다. 그 바람에 10년 전에는 왜 향로나 전통 문갑 같은 데 전통 무늬를 입사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작업하느냐는 비판도 받았다. 다행히 그를 응원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그의 현대적인 입사 예술품을 좋아한 입사 마니아들이었다. 
27년 동안 자신의 작품만 제작한 것이 아니다. 전쟁기념·마사박물관 유물의 입사 복원에도 적극 참여했다. 집 앞 목조 건물에 그녀가 복원한 유물과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고색창연한 가야시대 말안장과 환두대도, 고려시대 갑옷과 투구, 조선시대 사인검(四寅劍)과 장신구에 새겨진 입사 무늬는 아름답고 눈부셨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칼. 가야시대 쌍칼과 의식용 칼도 있었는데, 잔인한 무기답지 않게 손잡이와 고동(손잡이 아래쪽 둥근 테 부분) 등에 새겨진 별자리와 구름무늬, 상형문자와 범어 등이 돋보였다. 그녀는 “10년 넘게 유물 복원에 참여했다. 그 덕에 전통공예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요즘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작품은 명상자(冥想者)들이다. 얼핏 보면 그 작품들은 가부좌 튼 스님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앞뒤에 아롱아롱한 무늬가 찬연하다. 그녀는 “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 몸에 새긴 마음(무늬)은 결코 불교적이지 않고, 모양도 다 다르다. 자연에서 매일 보고 느끼는 것을 그려 넣은 덕에, 명상자의 몸에서 비가 내리고, 해가 반짝거리고, 꽃이 피어 있고, 유성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그녀는 “비록 쇠에 그린 풍경화지만, 사람들이 따뜻하고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묵직한 쇠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쇠가 풍기는 냉철하면서 심오한 ‘회색 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마치, 승려 혹은 명상자처럼. 이윽고 그녀가 공구를 들고 쇠를 똑똑 치거나, 탁탁 건드렸다. 천천히 부드럽게 그리고 섬세하게…. 그러자 쇠에 고아한 풍경화가 나타났다. 그러나 미흡했는지, 고개를 갸웃하고 한참을 더 쇠를 만진다. 그 뒷모습이 마치 구도자 같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모처럼 만난 느린 삶. 그 삶이 그녀의 작품만큼 아름답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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